[說.來臨 묵상] (상처치유). 삼하 15장 31-37 상처의 감옥에서

[설래임 說.來臨]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說.來臨 묵상] (상처치유). 삼하 15장 31-37 상처의 감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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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는 평생을 스스로 상처의 감옥에 가둔 사람과 탈출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히도벨과 다윗입니다. 아히도벨은 상처를 준 사람에게 나아갔고, 다윗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상처를 다루는 선택의 차이는 인생 전체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한 사람은 상처의 감옥에서 일생을 쓰라리게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상처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유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상처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지혜! 본문은 그 지혜가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오늘의 .來臨 묵상] (상처). 삼하 1531-37 상처의 감옥에서

 

1. 압살롬의 반역. 피난길에 오른 다윗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가장 신뢰했던 아히도벨이 반역자들의 편에 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히도벨. 그는 일찍이 다윗으로부터 모사로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대상27:33). 유비의 제갈공명, 아히도벨은 다윗에게 그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삼하 16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저의 모든 모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이와 같더라.” 다윗이 하나님처럼 신뢰했던 지혜의 사람, 나라의 중대한 문제를 논의하며 자신의 깊은 속내를 드러내며 가장 의지했던 사람 그가 바로 아히도벨이었습니다.

 

2. 아히도벨은 왜 반역의 길에 들어섰을까요? 단순히 대세(大勢)라는 흐름을 따랐던 걸까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안그런척 해도 사실 누구나 다 그러니까요. 누가 기우는 배에 타고 싶겠습니까? 침몰하는 배의 선장이 되기보단, 3등칸이라도 안전한 배에 몸을 싣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아히도벨의 반역은 대세를 따르는 것 이전에 오래된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3.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였습니다. "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히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아들 엘리암)"(삼하23:34).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삼하11:3). 이 두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밧세바의 아버지는 엘리암이었고, 엘리암은 아히도벨의 아들이었습니다. 혹시 성경의 많은 이름 같이, 이름만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삼하 1512절은 분명히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을 길로 사람이라고 수식합니다.

 

4. . 아히도벨은 자신의 손녀 밧세바의 단란했던 가정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그 일을 결코 잊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입장에서 다윗은 악랄한 가정 파괴범이었던 것입니다. 가문의 명예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던 당시의 문화 속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딸의 가정을 권력의 힘으로 하루아침에 파괴해버린 다윗을 아히도벨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아히도벨은 자신의 평생을 상처의 감옥에 스스로 가두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탁월한 지혜를 오로지 복수의 칼날을 가는 재료로 사용했고,  그 결과 아히도벨은 자신의 인생을 잃어버렸습니다. 복수만이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꺼내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피나는 수고와 노력 끝에 결국 다윗의 최측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회만을 엿보다 드디어 다윗을 무너뜨릴 수 있는 찬스를 붙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살아왔던 아히도벨의 인생은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참함으로 마감하게 됩니다(삼하17:23). 일생을 상처의 감옥에 스스로 갇혀 자유와 평안을,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입니다. 

 

5. 반면에, 본문에는 상처의 감옥에서 탈출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물론 자신의 죄값을 받는 과정이었지만) 지금 누구보다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압살롬-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 자신의 목에 칼 끝을 겨누었고, 자신이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람-아히도벨이 자신을 배반했습니다. 자기 잘못을 떠나 다윗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아히도벨과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는 압살롬의 반역의 소식을 듣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고(삼하15:25-26), 아히도벨의 배반의 소식을 듣자마자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하옵건데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삼하15:31). 한 사람은 상처를 준 사람에게 나아갔고, 다른 한 사람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그 결과 한 사람은 상처의 감옥에서 일생을 쓰라리게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상처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유와 평안을 얻게 된 것입니다.

 

6. 주는 사람은 없는데 받는 사람만 있는 것이 상처라 합니다. 우리는 늘 예기치 못한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상처투성이, 어쩌면 우리 인생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모두에게 불공평하기에 공평한 것이라는 말처럼 누구도 상처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상처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다른 한 사람은 상처의 감옥에 갇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차이입니다. 상처받을 때, 상처 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손에 우리의 상처를 맡겨야 합니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라면은 엄마에게, 상처는 하나님께!" 아히도벨의 지혜가 아닌, 다윗의 지혜를 갖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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