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오직주님만을] 눅10:8-42.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마음 품기(Having a Mary Heart in a Martha World)

[설래임 說.來臨]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시선/오직주님만을] 눅10:8-42.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마음 품기(Having a Mary Heart in a 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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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마음 품기 Having a Mary Heart in a Martha World

#부제: 이의 있습니다! 마르다 여전도회는 왜 없는 겁니꽈?
 

1.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눅10:38-42)를 “봉사 vs 성경공부” 혹은 "섬김 vs 예배참석" 이런 식의 대결구도로 보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글쎄요. 전 이런 식의 ‘Doing 대결구도'는 불편합니다. 성급한 이원론적 시각 같기 때문입니다. 마르다 자매도, 로렌스 형제도 모두 겁나 섭섭해 하실 것 같습니다.


2. 마르다의 분노 게이지는 분명 급상승 중이었습니다.

“주여, 쟤 진짜 싸가지 없는 거 안보이세요? 언니가 혼자 죽도록 고생하는데 너도 가서 도우라고 말 쫌 해주세요.”

자기가 직접 하면 될 말을 굳이 예수님께 전해달라 한 것은, 동생의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께 자신을 좀 알아달라고, 자기가 지금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당신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지 알아달라 어필하는 겁니다. 부엌에서 일하면서 혹시나 자기 존재가 잊혀질까 부화가 치민 겁니다. 곧 먹게 될 음식이 누구의 수고를 통해 제공된 것인지 모두에게 똑똑히 알리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그런 바램의 크기만큼 눈에 띄는 자리에 혼자 교양있게 앉아있는 동생이 얄미워진 겁니다. 아, 마르다가 너어무 공감됩니다.


3. 그 사이, 눈치 없는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당시 율법은 여자가 랍비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마리아는 사람들의 힐난하는 시선도, 째려보는 언니의 따가운 눈총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발 아래서, 예수님과 눈을 마주치며 교제하는 것이 너어무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4. 시선! 시선이 문제였습니다. 사실, 문제가 된 것은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였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1-42)

마리아가 택한 ‘좋은 편’이란 ‘좋은 몫’(새번역)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몫(분깃)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봉사도, 성경공부도, 심지어 예배참석도 아닙니다. 우리는 봉사하면서도, 성경공부하면서도, 찬양하고 기도하며 예배하면서도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doing)때문에 가장 좋은 몫을 놓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할수록 그 위험은 그만큼 더 커집니다.


5. 오늘 오해를 벗었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아가 택한 좋은 편(몫)은 봉사와 성경공부 중, 하나를 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배도, 성경공부도, 부엌봉사도 모두가 똑같이 거룩한 것입니다. 봉사의 자리는 대게 더 성숙한 분들의 몫입니다. 예배가 섬김이고, 섬김이 예배입니다. 둘은 갈라지고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칭찬받은 것은 그녀의 눈과 마음에는 오직 예수님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가 실패한 지점은 부엌이 아니라, 시선이었습니다.

epilogue.

6. 훗날 요한복음 12장에서 (베다니)마리아는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는 섬김을 행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봉사를 행합니다.

누가 마리아를 봉사 대신 말씀 듣는 자리에만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까? 틀렸습니다. 마리아는 봉사보다 성경공부를 더 좋아한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께 초점 맞추는 것을 가장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7. 그럼, 그 때 마르다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제는 부엌이 아닌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었을까요?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2-3)

마르다는 그 때에도 주방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때 그렇게 주님께 혼나고도 아직 정신을 못차린 겁니까? 그런게 아닙니다. 마르다는 '좋은 편(몫)'을 택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들어주신 그 모습대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여전히 주방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8. 그러나 이제는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르다의 시선이었습니다. 마르다가 만약 일전에 예수님의 책망을 오해했었더라면 혹은 그때 상처받았더라면, 그녀는 오늘 부엌에 있지 않았을 겁니다.

“흥칫뽕! 예수님, 그래요 그럼. 이제 나도 앞으론 봉사고 뭐고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내 동생 마리아처럼 그냥 주님 발치에 편히 앉아만 있을겁니다.” 이런 삐딱한 결심을 하고 이제 다신 예수님을 섬긴다고 부엌에 들어가는 일 따윈 하지 않을 법도 한데, 마르다는 오늘도 여전히 그 때처럼 부엌에서 예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녀는 제대로 알아들었던 겁니다. 다른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건, 자신은 부엌에서 자신의 은사로 최선을 다해 봉사하며 그러면서도 이제는 예수님께 자신의 시선을, 마음을 온통 드리고 있던 것입니다.

이제 마르다는 봉사하면서도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가장 좋은 몫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Comments
최고관리자 2022.02.08 08:50  
마르다의 식탁(클릭-찬양듣기)
https://youtu.be/ftfxmNizj0g

언제쯤 오시려나 저 언덕에
오르는 나의 매일은 길고 긴 기다림
주께서 지나시는 길
그 지친 발걸음 편히 옮기시기를
내 작은 식탁 차려 그 분 맞으리
주님께 드리는 나의 향기 또 나의 눈물
주를 위한 식탁 이 곳이 나의 지성소
주님만 향하는 나의 예배 나의 전부
주를 위해 드리는 이 시간
이 곳이 나의 지성소
때론 분주하여 주 음성 놓치고
내 믿음 연약해져 주님 원망도 했지만
내 작은 바람은 이것 뿐
머리 둘 곳 없는 주께서 오셔서
내 거친 식탁에 앉으시도록
옥합을 깨뜨려 빛나는 마리아처럼
칭찬은 나의 것 아니리
다만 나는 소금으로 녹아
주를 위한 만찬이 되리니
Jesus
알고 있는지 그대 식탁을
내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착한 그대 마음 그 거룩한 헌신을
알고 있는지 그대 식탁을
내 얼마나 기다리는지
나는 알고 있단다 고운 그대 마음
그 고요한 섬김을
최고관리자 2022.02.08 09:45  
마르다의 부엌봉사 vs 마리아의 성경공부. 이런 식의 <Doing(행위) 대결구도>로 성경을 읽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마르다의 문제는 좋은 편(몫/분깃/portion/part)을 택하지 못한 것입니다. 문제는 봉사냐 성경공부냐가 아닙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그 마음과 시선이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봉사의 자리에서도 주님을 마음에 가득 채울 수 있고, 예배의 자리에서도 주님을 향한 시선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신의 무엇을 책망하신 것인지 정확히 이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엌에 있던 것이 마르다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