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1편] [예배와 평온] "젖 뗀 아이 같이"

[설래임 說.來臨]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시편 131편] [예배와 평온] "젖 뗀 아이 같이"

나들목 0 3558

시 131편 1-3절 젖 뗀 아이 같이 #평온

1. 안녕하십니까? 세상이 안녕하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불안(不安)은 말 그대로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불안은 여기저기서 포모(FOMO) 현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FOMO란 'Fear Of Missing Out'의 약자로, 자신만 세상의 흐름을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뜻합니다. 본래 FOMO는 마켓팅 용어로 제품 공급량을 줄여서 소비자를 조급하게 만드는 마켓팅 기법(ex. 매진임박, 한정수량)입니다.
세상이 온통 불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의 사재기 현상 때문에 물, 쌀, 마스크, 세니타이저, 기저귀, 화장실 휴지를 구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라고 합니다. 총기류 판매량은 그 어느 때보다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불안감 때문입니다. 바이러스 방역도 중요하지만, 심리 방역 역시 중요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었더라도 사실 이 세상은 그리고 우리는 이미 충분히 두려웠고, 불안했습니다. ‘anxiety disorder(불안장애), panic disorder(공황장애)’란 말들은 얼마전만해도 의사들이나 쓰는 용어였지만, 어느덧 우리의 일상의 용어가 되어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의 왕들조차 누리지 못하던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난 안전하지 않다.’ ‘내 인생, 안전하지 못하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곤 합니다. 이 불안(Anxiety)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시편 131편은 비록 흔들리는 우리 인생이지만, 그 속에서도 불안에 떨지 않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보여줍니다.

2. 첫째, 지금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고, 일등이 되려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시 131:1 (개역개정)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메시지성경/유진피터슨) 하나님, 나는 대장이 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으뜸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남의 일에 참견도 하지 않았고, 거창하고 허황된 꿈을 꾸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불안을 느끼는 대부분의 이유는 현재 우리에게 무엇인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아직은 부족하다고 느끼는 감정 때문입니다. 이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일등(대장, 으뜸)이 되려 합니다. 가장 앞선 곳에 서면,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평안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쓴 다윗은 젊은 나이에 나라의 영웅이 되었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대장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위의 고백처럼 스스로 대장되길 결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롤러코스타처럼 요동치는 인생의 여정 속에서도 늘 현재의 모습에 만족했습니다. 그는 남과 비교하며 교만하지도, 열등감에 시달리지도 않았고, 거창하고 허황된 꿈을 꾸지도 않았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현재 자신이 왕이면서도 다윗 하나로 인해 끊임없이 불안했습니다. 다윗 때문에 대장 자리, 으뜸의 자리를 행여나 놓칠까 노심초사했습니다. 쫓기는 다윗은 평안했고, 쫓는 사울은 불안했습니다. 광야의 다윗은 평안했고, 왕궁의 사울은 불안했습니다.

가장 앞서가는 대장이 되고, 가장 높은 으뜸의 자리를 차지해도 우리 인생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우리의 이 끝없는 불안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알랭 드 보통는 그의 책 ‘불안’에서 말하길 사람들의 끝없는 불안감의 원인을 ‘허약한 자존감’에서 찾습니다. 허약한 기초 위에 집을 지으면 아무리 멋진 집이라도 쉽게 흔들리고 급기야 무너지는 것처럼, 허약한 자존감이란 기초 위에 세운 인생은 아무리 멋지고 으뜸이어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그런 허약한 자존감은 어린시절 우리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갓난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부모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용 받습니다. 옹알이 말 한마디만 해도, 아장거리는 한 걸음만 떼어도 부모는 그 아이를 특별하고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학교를 가고 성적표를 받아오기 시작하면서 그런 부모는 사라지고, 평가하는 부모가 나타납니다. 성적표로, 각종 성취의 지표로 아이는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불안감, 그 원인이 되는 허약한 자존감은 그렇게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것이 알랭 드 보통의 분석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으뜸이 되어야 하고, 남다른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어려선 다른 아이보다 성적을 잘 따야하고, 직장에선 다른 동료보다 성과를 많이 올려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세상의 메시지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로서 인정받으려면 교회 사이즈가 커야하고, 교인의 숫자가 많아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그렇게 매겨지는 사이에 우리의 자존감은 말 한마디에도 무너질 정도로 허약해져 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허약한 자존감란 기초 위에 세워진 우리 인생의 집은 아무리 멋지게 세워보아도 결국은 끝없는 불안감으로 흔들리고 요동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큰일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놀래킬 만한 일을 성취하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일등이 되지 않더라도 괜찮았습니다. 왜? 그에게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는, 현재의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진짜 엄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엄마의 이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3. 일생이 흔들리는 상황 속에 놓여 있던 다윗은 놀랍게도 자신의 영혼이 실로 고요하고 평안하다 고백합니다(시131:2). 다윗은 자신이 그토록 평안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자신이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젖 땐 아이 같기 때문이고 합니다.

시 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여기서 젖 땐 아이란 엄마 젖을 이제 그만 먹고 이유식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젖 땐 아이’란 갓난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젖을 배불리 먹고 젖을 떼고 잠든 모습입니다. 엄마 젖을 배불리 먹고 엄마 품에서 잠은 갓난아이의 표정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평안한 표정입니다. 집에 돈이 다 떨어져도, 궁궐은커녕 초가집에 살아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소란스럽게 해도,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나 세상을 요동치게 한다 할지라도 “엄마 품에서의 젖 땐 아이”는 그저 평온합니다.
다윗이 그런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위협하던 적들을 다 제압해서도 아니었습니다. 학교 성적, 회사 실적, 비즈니스 성과와 상관없이, 얼마나 더 성취하고, 더 많이 가졌는지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이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의 품에 지금 내가 안겨 있기 때문에 누리는 평안이 바로 다윗이 누린 평안인 것입니다.

젖먹이 갓난아기는 엄마 외에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갓난아이의 모든 필요는 엄마의 손에서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갓난아기는 배가 고파도, 겁이 나도, 불편해도 엄마만 바라봅니다. 엄마 품에서 배불리 젖을 먹은 아기는 세상 전체가 요동친다할지라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엄마만 있으면, 엄마 품에서 그 젖만 풍족히 먹으면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시 131: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O Israel, put your hope in the LORD both now and forevermore. (이스라엘 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스스로에게 말해보세요.)
그렇습니다. 흔들리는 인생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만 합니다.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주의 친절한 팔에 안겨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는 불안해 울고 있는 갓난아이입니다. 엄마 품이 그리워 우는 갓난아이가 장난감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예쁜 옷을 사주면 웃을까요? 달콤한 사탕을 주면 울음을 그칠까요? 아닙니다. 엄마의 품을 찾아주어야만 합니다. 그 품에서 젖을 먹어야만 갓난아이는 비로소 평온해집니다. 불안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안정된 삶의 기반이 아닙니다. 문제없는 세상이 아닙니다. 불안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 품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4. 시편 131편의 [표제]는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예배자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불안한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품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바르게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영혼은 예배를 통해 불안에서 평안으로 나오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예배하기 직전까지도 불안과 두려움에 떨던 사람인데, 예배를 드리고 나면 담대해집니다. 얼굴에 그늘이 걷히고 평안의 생기가 돋아납니다. 쫓기던 삶에 여유가 생기고 무너진 마음에 용기가 일어납니다. 상황이 달라져서가 아닙니다.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소란스럽고, 인생은 여전히 이런저런 문제로 흔들립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 그 품에서 신령한 젖을 풍성히 먹고나니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젖 땐 아이와 같은 평안을 예배를 통해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자의 축복입니다.

5. 요한일서4장 18절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만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찬송과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주의 친절한 팔, 그 크신 팔에 안겨야 합니다. 그 품에서 우리는 현재의 나의 모습에 만족하게 될 것이며, 그 품에서 우리는 젖 땐 아이와 같이 평온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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