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 울지말라

[부활신앙] 울지말라

최고관리자 0 1392
2014년 고난주간이었습니다.
모든 기억되는 상처는 경험되는 상처라고 했던 미로슬라브 볼프의 말처럼, 해다마 이맘 때가 되면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경험되어지는 현재진행형 상처가 있습니다.
네, 세월호 사건입니다. 세월호 3번째 해가 되었을 때, 생때같은 자식을 바닷속에 묻은 한 어머니의 기도문이 떠오릅니다. 편집하여 올립니다.
 
"
창조주 이시며 전능자라고 불리우는 당신께 기도 드리는 거 쉽지 않습니다. 3년 전 우리 아이들의 살려 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외면 했었으니까요. 당신께 등 돌리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 당신이 계시더군요.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던 분들이 눈물가득 고인 눈으로 다가와서 안아주시며 같이 울어 주시는 따뜻함에서 당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아이들이 살려 달라고 당신께 기도할 때 그 기도 좀 들어주시지 왜 우리 아이들이 없어진 지금 모르는 사람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나요?
2천년전 온 세상에 어둠이 덮치고,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는 기록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을 느끼게 해줍니다. 같은 아품을 나눌 수 있는 분이 하나님 당신이셔서 다시 당신께로 향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면서도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이 몰라서 저지른 일이라며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 모습을 닮기란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렇게 기도하신 예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가장 잘 섬긴다는 큰 교회들은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기보다는 애써 외면하거나 오히려 비난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처럼 모르고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쌓아 올린 바벨탑이 너무 높고 견고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저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저들을 불쌍히 여기실 분은 하나님 당신 밖에 없습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 2017년 4월 11일. 단원고 2-5 이창현엄마 최순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놀라울만큼 무관심하고, 이따금씩 건네는 위로의 무게는 깃털보다 가볍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우리 주님은 아들을 잃은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 하십니다. NIV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When the Lord saw her, his heart went out to her and he said, "Don't cry."(Luke 7:13).

His heart went out to her.
단지 감정적으로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입니다. 주님의 심장이 애통으로 가득한 그녀 삶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을 소생시켜주십니다.

이 사건은 부활사건의 프리퀄(prequel)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곧 그 십자가에서 온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그동안 절대권력을 잔인하게 마구 휘둘렀던 폭군 그 죽음을, 죽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심장을 내어주심으로 인류의 역사 가운데 끝없이 이어지던 죽음의 행렬을 깨뜨릴 것이며, 마침내 부활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인성문 앞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장면의 궁극적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울지말라' 말씀하실 땐, 그 말 속엔 우리를 울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겠다는 주님의 의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고통받는 이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며, 다시는 울지 않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자신의 심장을 꺼내어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말입니다.

나인(Nain)이란 성의 이름은 본래 '기쁨'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의 성읍에서 이 여인은 한없는 슬픔과 절망에 둘러 쌓여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이며,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역시 기쁨의 동산 '에덴'을 상실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네, 나인성 과부의 슬픔과 절망은 오늘 우리에게 경험되어지는 현재진행형 상처와 슬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때 나인성 과부가 들었던 그 주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울지말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에 대한 해석이나 설명 따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고통의 문제를 해석해주시는 대신, 십자가에서 온 세상 만물의 고통에 참여하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영원한 소망을 선물해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믿고 있으며,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부활신앙'입니다.

어둠이 두려운 이유는 어둠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어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해가 진 저녁, 귀가하는 이에겐 집 앞 익숙한 골목의 어둠은 두려움이 아닌 오히려 설래임입니다. 거기엔 집이, 가족이, 사랑하는 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유난히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와 함께 덮은 이불 속 어둠은 두려움이 아닌, 포근한 안정감입니다.
죽음 역시 그러합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음 너머에 우리가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짙고 깊은 어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부활신앙은 그렇게 우리를 위로하며, 우리를 담대하게 하며, 우리를 일어서게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이끌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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