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자존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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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이관대 WHAT IS MAN? (시편 8편)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여기서 사람은 히브리어로 에노쉬란 단어를 쓰는데, 그 뜻은 곧 사라질 연약한 존재란 뜻이고, 인자는 히브리어로 벤-아담으로 그 뜻은 흙의 아들 즉 흙으로 돌아갈 존재란 뜻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란 아무것도 아닌 존재란 말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바라보던 광활한 우주 속에서 문득 자신은 너무나도 작은 존재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작은 자신을 광활한 우주의 렌즈를 ZOOM IN 하시어 주목하시고, 세밀히 돌보아 주시고 계심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사람의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미천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눈과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품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그런 가치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만들려 애를 씁니다.


혹시 있어빌러티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있어보인다’와 영어의 어빌러티, 능력을 붙여서 만든 신조어입니다. 있어빌러티; 실상은 별거 없지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뭔가 있어 보이게 자신을 잘 포장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왜 있어빌러티 허세를 부리는 걸까요? 간단합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봤자 사람들은 실제의 삶에선 열등감과 우울감에 시달립니다.

사람은 진정으로 자신의 존귀한 가치를 알고,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려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만남 안에서 미천한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3장 9절에서 자신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싶다”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모두 들의 풀처럼 쉽게 말라 시드는 에노쉬고,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벤-아담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 그 안에서 재발견된 사람은 자신의 존귀한 가치를 깨닫고 Nothing이 아닌, Everything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혹시 '물음느낌표'라는 기호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 

물음표와 느낌표가 결합된 유니코드 부호 U+2048가 바로 물음느낌표(⁈)입니다. 1962년 미국 광고 회사 사장인 마틴 스펙터가 ‘수사학적 질문’의 라틴어 ‘인테로가티오(interrogatio)’와 감탄사를 표현하는 인쇄 은어 ‘bang’을 조합해 물음느낌표를 ‘인터러뱅’이라 이름했습니다. 인터러뱅, 물음느낌표는 지금 산업계에서 혁신의 아이콘이라 불립니다. 기존의 당연하게 여긴 것들에 물음표를 던지고, 더 나은 새로운 무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 그러다 아! 바로 이것이야! 하고 느낌표를 찍는 것. 그렇게 물음표와 느낌표가 만나 함께 가는 것! 그게 바로 인터러뱅입니다.

오늘, 다윗은 고대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What is man? 사람이란 무엇인가?” 다윗의 물음표는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자 느낌표를 만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는 작고 초라하고, 쓰레기 같은 존재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를 생각하시고, 나를 돌보고 계시구나!” 다윗의 인생에 물음 느낌표! 인터러뱅이 찍힌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제 고백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의 존귀한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무엇을 보아도 다 아름다워지는 법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다윗처럼 질문해야 합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자기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자기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돼지는 없습니다. “난 왜 아무거나 먹어도 맛있는가?”, “난 왜 구정물에 뒹굴고 있는데 불편하지 않은가?” 스스로 묻는 돼지 보신 적 있으신가요? 밀림의 사자가 초원을 달리며, 창공의 독수리가 하늘을 날며, 바다의 고래가 평생 수영을 하면서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묻지는 않습니다.


어떤 위대한 피조물이라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GBC 청취자 여러분,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없으면 그저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면 우리 역시 다윗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저를 생각하시고, 대체 하나님이 뭐가 부족하셔서 나 같은 죄인을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우주의 먼지같이 미약한 존재인 제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영광을 주신 것입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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