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본회퍼의 설교 "교회의 의미를 망각하다"

[설래임 說.來臨]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교회] 본회퍼의 설교 "교회의 의미를 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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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의 설교 [교회의 의미를 망각하다]
/고린도전서 12:26-27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
가톨릭 신자에게는 그저 듣기만 해도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심판의 공포와 전율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의 달콤함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신자의 내면에 자리한 온갖 종교 감정의 심층을 흥분시킵니다. 그 단어는 본향에 있는 것 같은 감정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감사와 경외가 충만하여,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를 향해 아이가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일깨우는 단어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우리가 고향 집에 방문하거나, 유년 시절에 뛰놀던 공원에 발을 들여놓을 때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요.
개신교 신자에게는 한없이 평범한 단어, 다소 냉담하고 쓸데없는 것의 울림처럼 들리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개신교 신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종 권태감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종교 감정에 전혀 활기를 주지 못하는 단어이지요. 비록 우리가 그 단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리거나 아득한 옛적의 의미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바로 그 단어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 단어를 다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우리 삶의 관심사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의미를 망각한 단어는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영광과 위대함을 조금이라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교회의 광채와 빛을 조금이라도 살펴보는 일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아, 수백 년 동안 이 단어에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상태여서, 감히 성공을 바라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예수께서 고별사에서 귀히 여기신 것이 무엇인지,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탁월하게 언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현대인이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곤경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교회가 되기 위해서 오늘 오후에 에베소서의 몇 장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제 교회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외적 정치 세력으로서의 교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가톨릭교회에 맞서는 것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일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공동체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온갖 문제에 시달리며 바울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 준 사람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 근친상간하는 사람들이 속해 있는 무리에 보낸 편지입니다. 오늘의 우리와 같이 죄의 영향 아래 있으며 믿음이 부족한 공동체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바울은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어야 합니다'가 아니라, '여러분은 무엇입니다'라고 썼습니다. 바로 몸입니다. 죄인이든 아니든 간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것이 바울에게는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소리쳐 알리는 듯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하셨으니 여러분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담대한 은혜로 우리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은 우리 모두를 한 생명체에 이어 붙이셨습니다. 그 생명체의 힘과 명예와 피와 정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에 합류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지상에 한 공동체를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공동체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잎새가 나무의 삶을 함께 영위하듯이, 우리 몸의 한 지체가 우리의 삶을 함께 영위하듯이, 우리는 그 공동체의 삶을 함께 영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공동체에, 곧 자기 교회에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신 거룩한 공동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종탑이 있는 이런저런 건물이나 조직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백성, 곧 순례하는 백성의 현세적 집이자 본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 바로 우리가 그 지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공동체와 똑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영원의 선물을 가질 자격을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깃발을 들고 그분의 세상 순례를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기대어, 곧 영원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더불어 산다는 뜻입니다. 교회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민족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멀리서 세상을 가로질러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민족과 그 관습들을 접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한 백성에 관해서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적은 수일지라도 우리 가운데서도 만날 수 있고, 자기 고향을 떠나 보지 못한 사람들도 마주칠 수 있는 백성입니다. 그 백성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온 세상에서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다수의 개인을 뜻하는 단순한 표현은 아닙니다. 그것의 참된 뜻은 독자적인 법과 규칙을 지닌 당당한 백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 은밀하게 신비로운 관계를 맺고, 서로를 위해 행동하고,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힘차게 서로를 섬기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배 수호 기사들의 현세적인 눈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듯이, 보이지 않게 존속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매일 밤마다 모여서 연합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주 멀리서 찬란히 빛나는 본향을 향해 순례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암흑 가운데 살면서도 빛을 보고 가야 할 길을 아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왕들과 제후들의 백성이 아니라, 저마다 자기 짐을 끌고 가야만 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짐을 지고 수고하면서도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해방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십자가를 지고 있지만 탁월한 통찰력을 갖춘 사람들로 이루어진 백성입니다. 칠흑 같은 밤중에도 안전하게 인도할 줄 아는 통치자가 있는 백성입니다. 길에서 발을 헛디딘 사람을 일으켜 부축할 줄 아는 백성,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기에 서로 사랑하는 백성입니다. 독일이나 프랑스나 미국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 손을 뻗어 여기저기서 자신의 지체를 찾고, 우리 가운데서도 여전히 찾고 있는 백성! 이 백성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백성"
이는 전례 없이 새로운 백성, 인간의 모든 경험을 능가하는 백성입니다. 저마다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것만 바라보고, 타인을 낯설게 대하는 이곳에서 서로 사랑하는 백성을 알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 사람이 있었는지요. 서로 사랑하는 완전한 백성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백성에 합류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지도 못한 채 이 백성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백성의 지지와 부축을 받고, 이 백성의 사랑을 먹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홀로 본향을 찾아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곁에는 우리를 도와주고 떠받치고 부축하며 길을 가리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백성 자체가, 곧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가 스스로 돕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세 가지 능력이 유효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각 공동체, 곧 그분의 교회들에 선사하시는 선물입니다. 각 공동체는 오직 그 능력들을 통해 존속하고,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첫 번째 능력은 타인을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희생하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희생—눈에 보이는 희생이나 보이지 않는 희생이나 매한가지로—할 때만 가능한 삶입니다. 희생의 능력은 연합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기에,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백성이 됩니다.
두 번째 능력은, 불가해하여 소수만이 알고 있지만 누구든지 약간의 믿음만 있어도 갖추게 되는 능력,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능력입니다. 수백만이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우리의 믿음을 위해, 우리의 능력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하나의 제단이며, 이 제단 위에서 백만 가지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는 것을, 백성이 두 손을 들어 우리를 위해 매 순간 은혜를 간구하고, 온 공동체의 마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생각만 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친구 동아리에서 몇몇 사람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대변하는 것을 상상만 할 따름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철저히 겸손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이 내 영혼의 구조자일 수도 있고,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한없는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돌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가 날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는 주일마다 예배 기도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주기도에서도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내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라고 기도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중보 기도는 온 세상에 있는 공동체를 결속시킵니다. 자기에게 없던 이 능력, 달라고 구한 적도 없는 이 능력이 어디서 갑자기 임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변해 주는 공동체의 기도에 대해 우리가 조금도 감사하지 않았음을 돌아볼 뿐입니다.
세 번째 능력은 특히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 중 가장 고상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이 능력은 가장 놀랍고, 가장 신비롭고, 가장 거룩한 것으로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나는 너의 죄를, 너는 나의 죄를—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없애 주는 능력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고백의 엄청난 비밀입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이 자기가 신뢰하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어머니에게, 자기 남편에게, 자기 친구에게 자발적으로 고백하면, 그 다른 사람이 자기 신앙의 전권으로 고백자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벗겨 주고, 고백자의 모든 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생활 속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없애 주는 능력은 가장 심오하고 참된 능력입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한 사람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능력을 가장 심각하게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고백과 죄 용서에서 얼마나 엄청난 능력이 나오는지를 완전히 잊었습니다. 한 사람이 곤경에 처한 다른 사람의 편을 들고 그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에게 그리스도가 됨으로써 그를 구해 내고 용서하는 데서 무적의 능력이 나오는데 말입니다.
희생과 중보 기도와 죄의 용서, 이 세 가지는 기독교 공동체의 놀라운 능력들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능력들입니다. 이 세 가지 능력은 모든 것을 연결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피입니다.
하나의 몸은 하나의 생명체를 의미합니다. 모든 지체가 하나의 삶을 영위하고, 같은 공기를 호흡합니다. 모든 지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같은 양식을 먹고, 같은 음료, 곧 주 예수의 피를 마십니다. 한 사람이 있는 곳에 모든 공동체가 있습니다. 누구도 혼자가 아니고, 누구도 버림받지 않으며, 누구도 떠돌지 않습니다. 다만 공동체가 사랑으로, 곧 희생과 중보 기도와 죄의 용서로 그와 함께 있습니다. 누구도 먼 곳에 홀로 있지 않습니다. 누구도 고통 가운데 홀로 있지 않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처음으로 세례반盤을 향해 나아갈 때 누구도 혼자가 아닙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때 누구도 혼자가 아닙니다. 생의 고된 투쟁 속에 있을 때도 혼자가 아닙니다. 의지할 곳 없이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도 혼자가 아닙니다. 가족 없이, 위안거리 없이 고독하게 떠돌며 늙어 가는 사람도 혼자가 아닙니다. 죽을병에 걸려 임종의 자리에 누운 사람도 혼자가 아닙니다. 슬픔과 괴로움 앞에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는 사람도 혼자가 아닙니다. 그가 여전히 혼자라고 할지라도, 공동체와 공동체의 주님이 그와 함께하면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서고,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를 붙잡고, 그를 위로하며, 불행 가운데 있는 그를 고향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줍니다. 그렇게 이 모든 것이, 곧 사랑이 그를 에워쌉니다.
그러므로 슬퍼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떠돌며, 죽어 가는 여러분,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의 백성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듯이, 고향이 제 자식을 품으로 끌어당기듯이, 그 백성이 여러분을 사랑으로 떠받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라고 했으니, 서로 떠받치고 사랑하되 자신도 사랑하고 떠받쳐 주십시오. 주님은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공동체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하나님의 사랑도 거기에 있습니다. 공동체 안으로,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하나님의 교회이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공동체이니, 다만 바라보고 놀라며 감사하십시오.
"사랑이 있는 고향과 같은 곳으로"
무능하고 연약하며 고향을 잃은 우리 시대를 구할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교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떠받치고,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하고, 하나님 안에서의 연합이 있으며, 무엇보다 사랑이 있는 고향과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하나님 백성의 한 부분, 곧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모든 공동 사회와 결혼과 친구 관계의 목표이자 의미이기도 합니다. 결혼 생활이 교회가 될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때, 두 사람이 하나의 삶을 영위할 때, 결혼 생활은 그 의미를 가장 깊게 표현하고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교회는 우리를 품고 사랑하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입니다.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교회, 이것은 우리 인간 공동체의 의미입니다. 교회, 이것은 이런저런 시대에 우리의 희망입니다. 옛 교부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교회는 우리 어머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주님."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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