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12. 부활주일 설교 요약 / 마 28:1-10,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가 되었네 A sigh becomes a song"

[설래임 說.來臨]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2020.4.12. 부활주일 설교 요약 / 마 28:1-10,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가 되었네 A sigh b…

나들목 0 6840

NDMV 2020. 4.12.부활주일 설교 요약


마 28:1-10,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가 되었네 A sigh becomes a song"


1. 위의 그림은 19세기 신고전주의 화가인 제임스 띠소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이름은 “What Our Lord Saw from the Cross(우리의 주가 십자가에서 본 것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그린 미술작품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화가들은 관람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그렸다면, 띠소의 이 작품은 매우 독특하게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시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예수님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시선만 보여줍니다. (사실, 예수님의 발이 살짝 보이기는 합니다.)


2. 이 그림에서 예수님의 시선을 한번 크게 크게 따라가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눈에 들어오고 있습니까?

첫째는, 네 여인과 한 남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비통한 표정으로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시선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표정과 몸짓을 보면 여전히 화가 잔뜩 나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고발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시선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로마의 군병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왜 저 십자가에 달려 있는지 이유도 잘 모릅니다. 아니 관심자체가 없습니다. 그저 위에서 하라는 대로 잔인하고 모질게 한 죄인을 다루었을 뿐입니다.

네 번째, 저 멀리 예수님의 시선에 잡힌 사람들은 구경꾼들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까워는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입니다. 우리가 TV에서 한 의인의 의로운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잠깐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들듯이 그들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는 아니면 거리가 멀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표정은 드러나지 있지 않습니다.


아마 띠소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이들 중 어디에 속해 있는가? 이 그림 속 어느 자리 즈음에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시선에 들어올까요?


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시선에 잡힌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이지만 그 때 그 자리의 그들에겐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 여기가 예수의 생명이, 예수의 스토리가 끝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모두가 도망칠 때 여기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그 사람들마저도 예수님의 삶은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슬픔과 비탄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4. 그러나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구주께서는 장사한지 사흘 만에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그 새벽, 예수님이 누워 계셨던 무덤가 그 현장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첫째는 예수의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고, 둘째는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기 위해 무덤을 찾아온 세 명의 여인(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 2명의 여자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사실 부활하신 주님을 기대하고 그 새벽에 무덤에 간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그 당일에는 시간적으로 그 시신에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었고, 안식일에는 율법 때문에 또 어쩔 수 없었고, 그래서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다음 날 새벽에(눅 24장) 주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기 위해 무덤에 간 것입니다.


5.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녀들도 ‘지키던 자들’처럼 똑같이 무서워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키던 자들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세 명의 마리아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현장에서 주님의 백성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둘 다 무서워했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똑같은 무서움과 두려움 속에도 우리는 다른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그녀들 역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 속에서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사들과 같이 똑같이 무서워했지만 그러나 그녀들에게는 두려움과 동시에 무엇이 생겼습니까? 큰 기쁨입니다! 이 큰 기쁨은 도대체 갑자기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그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6.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만나고 있는 이 상황(코로나19 바이러스)은 분명 두려운 것입니다. 주님을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모두에게 두려운 것은 우리에게도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두려움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본래 두려움은 좌절과 절망을 낳아야 하는데, 부활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여전한 두려움 속에서도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부활절의 축복입니다.


7. 오래전 펜실베니아에 엘리자 에드먼드 히윗이란 분이 사셨습니다. 이 분은 평생 교사로 섬기시며 특별히 불량 학생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적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평소처럼 불량소년을 상담하던 중 히윗 여사는 그 아이에게 기왓장으로 허리 부분을 얻어맞는 어이없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척추 뼈가 손상되어서 그 길로 그녀는 꼼짝도 못하고 병원에 누워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병상의 시간이 길어지자 히윗 여사의 마음에는 점점 증오와 원망이 쌓여 갔습니다. “이런 일이 왜 내게 일어났을까?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원망 중에 그녀는 깊은 두려움에 휩싸여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창밖의 풍경 하나가 그녀의 눈길을 붙들었습니다. 한 흑인 여자 청소부가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히윗 선생님은 괜히 화가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 청소부에게 그만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청소부 주제에 뭐가 좋지?” 그러자 그 청소부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모든 형편과 처지를 찬송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주셨으니 즐거울 수밖에요.” 히윗은 갑자기 온 몸이 감전된 듯한 충격에 빠졌고, 이윽고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하며 자신의 마음을 종이에 적어 내려갔습니다.

1.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이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2.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3.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8. 네 찬송가 370장의 가사입니다. 특별히 2절의 가사를 주목하여 보십시오.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 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네. 우리도 똑같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십자가 앞에 나아가면 오히려 두렵기 때문에 더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전에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이 암담한 시간을 통과하며 우리는 깊은 탄식을, 한숨을 내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부활의 주님 앞에 나아가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찬송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우리 주님은 주십니다. 모두가 힘겨운 이때에 히윗 여사와 같이 더욱 깊은 탄식을 뿜어낼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신 분들이 혹시 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구주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꾸어 사랑하신 분들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해내며 이 찬송을 불러보시길 권유드립니다.


9. 말씀을 맺습니다. 남태평양의 미국령 ‘괌’에는 요코이 동굴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1972년에 한 일본인 남자가 밀림의 아주 작은 동굴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남자의 이름이 바로 요코이입니다. 요코이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1944년에 괌에 상륙한 일본 군인이었습니다. 당시 미군과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참패를 당하고 섬을 완전히 포위당한 일본군들은 결사항전을 벌이다 죽거나 항복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이 요코이씨는 밀림으로 홀로 숨어듭니다. 그 때부터 28년간을 밀림의 작은 동굴에서 은신하며 혼자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가 발견될 당시 요코이씨는 아직도 전쟁 중인 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항복은 하기 싫고, 적들에게 여전히 포위되어 있는 줄 알고 혼자 밀림에서 그 오랜 시간을 외롭게, 두려움과 사투를 벌이며 그렇게 버티고 살았던 것입니다. 요코이씨가 28년 동안 왜 그랬을까요? 간단합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0. 우리 주님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우리 구주께서 사망 권세와 이 땅의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부디, 이 승리의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처럼 홀로 두려움에 떨며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부활의 소식을 들었고, 오늘도 승리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두려움 중에서도 기도할 수 있고, 한숨을 내쉬는 상황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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