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說.來臨 묵상] (교만). 렘 43장. 애굽으로 가는 길

[설래임 說.來臨]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說.來臨 묵상] (교만). 렘 43장. 애굽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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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臨 묵상. (교만). 43. 애굽으로 가는 길

 

우리에겐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애굽으로 가는 길과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지금 나는 어느 길 위에 서 있는가?"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야만 합니다.   

 

교만과 배척의 길

1. 요하난. 성경은 그를 교만한 자라 합니다(2).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과 계획을 합리화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다 이용하는 태도, 말씀으로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판단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내 생각으로 판단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가장 지독한 교만입니다. 이런 교만한 자들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미워합니다. 애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님을 전한 예레미야를 요하난과 무리들은 자신들을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려고 한다며 모함하고 미워합니다.

 

풍요와 안락의 길

2. 그들은 결국 애굽 땅 다바네스로 들어갑니다. 다바네스! 그곳은 바로의 집이 있는(9) 애굽의 중심부였습니다. 요하난과 무리들이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곳은 이미 애굽으로 향하는 길 위인 유다 남쪽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애굽에 도달해 있었고, 주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던 그들은 애굽으로 그것도 가장 중심부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창세기 요셉의 마음과 대조됩니다. 요셉은 애굽의 중심부, 그곳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약속의 땅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 위인 고센 땅을 바로에게 요청했던 것입니다.

 

우상 숭배자의 길

3. 애굽의 중심부로 들어간 요하난과 무리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신앙을 다 저버리고 우상숭배자들이 되어 버립니다(44).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자기가 판단하여 당장의 안전만을 위해 애굽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고 현실의 풍요와 안락만을 위해 애굽의 중심부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실 것이라 경고하십니다(10-11). 오늘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발걸음은 애굽으로 가는 길 위에 서 있습니까?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 위에 서 있습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주께서 말씀하시고 이끄시는 곳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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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글 전문 읽기]


43장 1-13. (교만).  애굽으로 가는 길

 

1. 요하난과 백성들은 애굽으로 내겨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아니, 4217절과 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2번이나 만일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면 그들을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치실 것이라는 경고를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성경은 그들을 교만한 자라 말씀합니다. 교만한 자는 단순히 자기가 잘났다. 최고다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만한 자는 단순히 행동과 태도가 거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교만한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2. 이미 다 자기 생각과 계획이 있음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행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번거롭게 왜 물었겠습니까? 애당초 순종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으면서 왜 물었겠습니까? 그저 점집 찾듯이 하찮은 위로나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단지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물은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 묻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순종하기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까? 아니면, 그저 내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 나를 지지해달라고 기도합니까?

 

3.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자기가 그 말씀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그것은 죄라고 했는데도, 교만한 인간은 그것은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보다 옳다는 것입니다. 동성애가 사람의 기호라고요? 아닙니다. 죄입니다.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까? 역시 아닙니다. 우리 구주께서는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셨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기가 주장하는 생각. 자기가 지지하는 신념, 이념을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 다른 말을 하면 쳐주지 않으면 상대방을 비난하고 배척합니다. 2, 3절을 보십시오. 애굽으로 가지 말고, 여기 남아 바벨론의 통치를 받으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준 예레미야를 그들이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예레미야가 지금 자신들을 갈대아인(바벨론)의 손에 넘겨주려 거짓말하고 있다고.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고. 모함하고 비난하지 않습니까?

지금 한국 사회가 꼭 이렇습니다. 그저 정치적 신념이 다를 뿐인데, 한쪽에서는 자기 생각과 틀리면 종북좌파 빨갱이라고 비난하고, 다른 쪽에서는 무조건 토착 왜구, 적폐 세력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혹시 아니면, 그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 문제는 우리 사회는 그렇다치더라도 이런 사회의 반목과 분열을 주도하는 세력이 소위 보수 기독교계라는 것입니다.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복음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사회주의에 속했고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속해 있습니까? 성경을 조금만이라도 겸손하게 묵상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사회주의 사상보다 더 사회주의 같은 모습임을, 그리고 동시에 이 세상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자유와 공평과 평등을 선사하는 자유민주주적인 나라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만 내 생각과 가치를 하나님의 뜻보다 더 옳게 여기고 내 생각만이 옳다고 악다구니를 쓰며 서로를 배척하고 있습니다. 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요하난의 이름을 잊지 마십시오. 그에겐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생각을 지지할 때에만 은혜로운 말씀이요 받을만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의 도구가 아닌, 자기 위안과 자기 합리화를 위한 도구로 변질키셨습니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는 그런 태도가 가장 큰 교만임일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4. 교만한 사람들은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실력과 세상의 힘을 의지합니다. “기도를 얼마나 오래 하는가?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로 그가 교만한 자인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가 결국 무엇을 의지하며 사는가를 보면 그가 교만한 자인지, 겸손한 자인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애굽으로 가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아셨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애굽이라는 세상의 힘을 더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애굽이 있습니다. 자기 실력, , 명예, 권력, 성공, 사람이 우리의 애굽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가장 의지합니까?

 

5. 요하난과 군대장관들과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의 동역자 서기관 바룩까지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그 모든 과정을 성경은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7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이러하였더라.” 이제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그럼 버리시면 되는데, 하나님은 기어이 고집스럽게 애굽에 들어온 그들에게 다시 또 말씀하십니다. 10, 11절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치고 잔혹하게 정복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10절을 주의깊게 보십시오. 그러한 일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내가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오리니”.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입니다. 왜 굳이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이겠습니까? 경고입니다. 이제라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혹시 들리십니까? 지금 벌써 애굽에 들어와 있을지라도 경고하시는 주의 말씀이 들릴 때에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6. 애굽으로 가는 길은 출애굽-구원의 길과는 반대의 길입니다. 그들이 가서 거한 지역은 9절을 보면 다바네스라 합니다. 지명은 기억하실 필요가 없지만, 그 지역의 특징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다바네스는 바로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9). 애굽의 핵심 도시 중 한 곳, 애굽의 중심부가 바로 다바네스입니다. 옛적 요셉은 바로에게 자신의 백성들의 정착지로 애굽의 변두리 고센 땅을 요청했습니다. 고센 땅은 유다와 가까운 애굽의 북동쪽 나일강 삼각주 부근에 위치한 땅입니다. 언제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는 땅이 바로 고센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후손들이 애굽의 힘에 의존하지도 않고, 애굽의 풍요에도 현혹되지 않고, 언젠가는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하난과 그 일행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현재의 풍요와 안전함만 생각하며 그곳에 남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곳에서 애굽에 동화되어 우상숭배자들이 되어 버립니다(44). 오늘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발걸음은 애굽으로 가는 길 위에 서 있습니까?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 위에 서 있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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