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說.來臨 묵상] (기도) 예레미야 42장. 답정너 하나님?
(요약읽기)답정너 하나님?
요하난과 백성들은 애굽으로 내려가려 합니다. 이스마엘이 바벨론의 총독 그다랴와 군사들을 살해했기 때문에 그 보복이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애굽으로 가는 길 유다의 남쪽 베들레헴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은 명백했습니다. 돌아가 바벨론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애굽이라는 스스로의 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보호해줄테니 걱정말고 돌아가라 말씀하셨어도,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애굽의 힘을 더 믿었습니다. 요하난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답.정.너’였을 뿐입니다. 답정너란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그들의 속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렘42:20)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스스로 답을 다 정해놓고 기도를 부탁하거나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는 아무리 간절하고 열렬할지라도 기도가 아닙니다. 스스로 마음을 속인 기만행위일 뿐입니다. 자기 욕심과 세상을 향한 정욕을 스스로도 속을 정도로 교묘히 가린채 산으로 올라가 열렬히 기도하며 소나무 뿌리를 뽑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공연한 삽질이요, 자연 훼손 행위일 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죄인이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 될 때 순종하기란 너무나 어렵기에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답정너가 아니라 주인이십니다.
(전문읽기)
說.來臨 묵상 / (기도) 렘 41:11-42:22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답정너_하나님
1. 시기심, 야망, 물질, 자기 이익을 위해 선한 통치자 그다랴와 그에 속한 70인의 사람들을 사악한 방법으로 살해한 이스마엘은 미스바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사로잡아 암몬으로 떠납니다(렘41:10). 한편, 이스마엘의 속셈을 미리 알아차리고 그다랴에게 경고했었던 군벌 요하난(40:13-16)은 그 소식을 듣고 이스마엘을 추격합니다(41:11이하).
2. 요하난과 그 군대의 추격을 받게 된 이스마엘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자신의 수하 8명과 함께 암몬으로 망명하게 됩니다(41:11-14). 그런데 요하난과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은 왠일인지 미스바가 아닌 유다의 남쪽 지역 베들레헴으로 가서 머뭅니다. 왜 미스바가 아닌 베들레헴이었을까요? 그들의 목적지가 남방의 강대국 애굽이었기 때문입니다(렘 41:17).
3. 왜 요하난과 백성들은 애굽으로 가려 했을까요? 그곳으로 가면 안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세운 총독을 죽이고, 그들의 군사들을 죽인 자는 물론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그랬든 다 한통속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요하난은 그것을 두려워했기에 그래도 안전할 것 같은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렘41:18).
4. 요하난과 백성들은 애굽으로 들어가기 전 예레미야 선지자를 찾아와 기도를 부탁합니다. 자신들이 마땅히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물어봐 달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부탁의 언어를 보면 ‘당신의 하나님께’라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습니다(렘42:2,3,5절). 왜 당신의 하나님입니까? 적어도 그들에겐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으로 여겨질 만큼 가까운 분이 아니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5.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기도를 부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 막론하고 순종하겠노라 고백합니다(렘42:6절). 참으로 기특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지자와 하나님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기만한 고백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지금 이미 어디에 와 있습니까? 애굽에 가까운 유다 남쪽 베들레헴입니다. 그들의 마음과 발걸음은 이미 애굽에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실리가 없는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렘42:20) 말씀하신 것입니다.
6. 바벨론의 통치를 받는 것은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 수없이 들었던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인다는 회개의 의미였고, 이제는 바벨론의 압제 아래서 하나님의 구원만 바라보겠다는 겸손의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모를 리가 만무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면서도 애굽으로 가는 것에 대해 다시 묻는 그들의 마음은 사실은 불순종에 대한 핑계와 자기 위안을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해야만 하는데, 눈에 보이는 애굽의 힘을 의지하고 싶은 자신들의 속마음을 스스로 가려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들은 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 마음을 속인 자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7. 오늘 우리 역시 스스로 답을 다 정해놓고 기도를 부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다 알면서도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리 열렬해도 기도가 아닙니다. 자기 욕심과 세상을 향한 정욕을 스스로도 속을 정도로 교묘히 가린채 산으로 올라가 열렬히 기도하며 소나무 뿌리를 뽑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공연한 삽질이요, 자연 훼손 행위일 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죄인이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순종하기란 너무나 어렵기에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매일 기도하고 기도를 부탁하는 많은 기도의 내용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고, 양보하고, 섬김, 희생하는 십자가의 좁은 길.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가 모르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요하난과 같이 이미 내가 다 세워놓은 계획을 하나님께 싸인만 받으려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성경에 기록된 바 그대로 우리가 순종할 수 있도록 겸손과 용기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요하난과 같이 사실은 세상(애굽)을 의지하기 위해 구하고 있는 기도가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 무엇을 의지하는 가를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점검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우리의 내면을 가장 정확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