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3 “감동받는 신앙에서 주님을 감동케 하는 신앙으로” (마26:6-13)
나들목비전교회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3 [Silent day, 침묵의 날]
▍마 26:6-13 [영적성숙/주님의 위로자] “감동받는 신앙에서 주님을 감동케 하는 신앙으로”
핵심메시지: "감동받는 것이 목표가 아닌, 주님께 감동을 드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자!"
1. 신약성서 4복음서를 읽다보면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신 다양한 사건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구주께서 이 땅을 사시며 누군가로부터 감동을 받으신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구주께서 깊이 감동하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예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한 사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얼마나 우리 주님이 기쁘시고 감동이 되셨으면, 이 날의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라면 반드시 이 일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마26:13).
2.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가지고 나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식사하시던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풍경을 바라보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여인을 비난합니다. 그 여인이 행한 일은 예수님께는 가장 기쁜 일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여인에게 왜 그 귀한 것을 허비(waste)하느냐? 힐난했습니다. 그렇게 허비하려면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팔아서 나누어주는 것이 더 값진 일이 아니겠느냐는 책망이었던 것입니다. 그 현장의 제자들은 아마도 그 여인의 행동을 전혀 제지하지 않으신 예수님에게도 은근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었겠죠. “주님이라도 말리셨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왜 그 값비싼 향유를 그렇게 낭비하게 내버려두시는 겁니까?” 라는 불만 말입니다.
3.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여인의 행동을 제지하시기는커녕 그 여인의 행동에 예수님의 생애에서 보기 드문 깊은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 계셨다면, 이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아낌없이 부은 이 여인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사실, 제자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공감이 되지는 않습니까?
4. 그러나, 향유 옥합을 깨뜨려 아낌없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이 여인의 행동은 가장 적합하고, 가장 옳은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절)고 말씀하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단순한 훌륭한 한 인간이었다면 이 여인의 행동은 제자들의 말처럼 ‘허비(waste)’가 맞을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번 부어서 없어지는 것이라면 차라리 가난한 자들을 위해 그것을 나누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어떤 것을 어떻게 드려도 ‘허비’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향유옥합 정도가 아니라 온 세상을 다 드려도 전혀 허비가 될 수 없습니다.
영국 최고의 명문가의 상속자였던 C.T.스터드는 그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안락함을 다 포기하고 그가 상속받은 막대한 재산을 남김없이 헌신하여 세계선교 역사에 길이 빛나는 WEC 선교회를 창설했습니다. 그 때 그가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그분을 위해 하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클 수 없습니다. If Jesus Christ is God and died for me, then no sacrifice can be too great for me to make for Him.”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고, 그 하나님께서 지금 곧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그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뜨려 하나님이신 구주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은 것이 어떻게 ‘허비(waste)'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는 무엇을 어떻게 드려도 낭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둘째, 진실한 사랑은 반드시 허비(낭비)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현장에서 그 여인의 행동을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평가하셨습니다. 주님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율법을 모르셨을리가 만무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보다 자신을 섬기는 것을 더 좋아하셨을 리가 만무합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우리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시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신바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오늘 주님은 그 여인의 행동이 주님께 좋은 일이라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좋은 일이란 단순히 착하고 선한 일 혹은 합리적인 판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좋은 일’이란 ‘적절한 아름다움’이란 의미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왜 좋았습니까? 가장 적절하고 적합한 곳에 하나님의 뜻대로 그곳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그녀의 행동은 지금 주님께 가장 적합하고 적절한 일이기 때문에 좋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어떤 길을 가고 계십니까? 십자가의 길입니다. 곧 주님은 우리를 위한 죽음의 길로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러면 지금 제자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죽으심을 예비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그 일을 예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그 일을 한 것입니다. 기름을 머리에 아낌없이 부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5가지 경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 세울 때 그리고 매우 귀한 손님이 왔을 때 그리고 장례의 때입니다. 지금 이 여인은 한번에 이 모든 것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귀한 영적인 통찰이 평범한 한 여인에게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결코 계산하지 않습니다. 계산하면 벌써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남자가 한 여인에게 꽃을 사다주면서 돈이 아까우면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했기에 아무 계산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계산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녀의 기름이 아닌 사랑을 받으셨기에 오늘 이토록 깊은 감동을 느끼신 것입니다.
5.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녀를 기념하라! 그녀를 본받으라!” 즉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게 되고, 그러면 주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때에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길을 가장 적절하고, 가장 적합하게 예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감각이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헌신하는 마음의 기초입니다. 주님을 진심과 전심을 다해 사랑하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우리의 것들을 ‘허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6. 오늘 예수님은 이 여인으로부터 생애 가운데 아주 드물게 온전한 헌신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녀는 자신의 옥합을 깨드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내가 깨뜨려야 할 향유옥합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아까워합니까? 우리의 가장 소중한 옥합을 아끼고 꽁꽁 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져 나와 아낌없이 깨뜨려 주님을 위해 드릴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향내가 풍성히 날 것입니다. 마치 그 여인이 오늘 주님을 위해 옥합을 깨드렸을 때, 그 향유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였던 것(요12:3)처럼 말입니다.
7.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그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랑에는 낭비의 본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생각을 낭비합니다. 물질을 낭비합니다. 아니,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낭비합니다. 낭비할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습니다. 오늘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아낌없이 쏟아 부은 이 여인의 심정이 바로 그랬던 것입니다.
누가 무엇이라 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낭비라해도, 제 정신이 아니라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내 영혼을 살리신 주님, 내 오라비의 생명을 되돌려 주신 주님, 이 주님을 위해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드린 그 여인의 마음은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이 옥합을 깨뜨리게 한 것입니다.
8. ‘창끝’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56년, 짐 엘리엇을 비롯한 다섯 명의 젊은 청년 선교사들이 에콰도르 밀림의 원시부족 아우카족에게 살해당하는 일을 그린 영화입니다. 대학교육을 다 마친 다섯 청년이 원시부족을 전도하다 살해당했을 때 그날 주요 신문 헤드라인엔 이런 글이 실렸다고 합니다. “그 아까운 젊은이들이 왜 이렇게 생을 낭비했는지 이해 할 수 없다.” 네, 맞습니다. 세상은 이러한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에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예수님을 위해 향유옥합을, 자신의 생명을 허비하는 것은 가장 큰 사랑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어떤 행유옥합을 가져나와 아낌없이 깨뜨리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