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5 “네, 나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Yes, I was there.” (마27:27-56)
# 그림. 왼편부터 차례로. (사진을 클릭하시면 그림을 확대하여 볼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 The Raising the Cross, 1633
2) 십자가에서 내려지심 The Descent from the Cross, 1633
3) 십자가에서 내려지심 The Descent from the Cross, 1633-34
나들목비전교회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5 [Good Friday, 수난의 날]
▍마 27:27-56 "네, 나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Yes, I was there."
1. 성금요일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신 놀라운 사랑이 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 구주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에 가장 슬픈 날이지만 동시에 십자가 구속의 영원한 은혜가 온 세상 가운데 선포되어짐으로 구원의 복된 소식이 들려진 가장 좋은 날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이 날을 가르켜 성금요일(Good Friday)라 하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동시에 여전히 사망의 권세 가운데 묶여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또한 전 세계의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하며 기도해왔습니다.
2. 위의 그림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유럽 회화 역사상 가장 탁월한 화가로 알려진 램브란트(Rembrandt)의 작품들입니다. 램브란트는 성경 신, 구약의 주요 내용들을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일은 램브란트가 자신의 작품 속에 자기 자신을 종종 그려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스데반의 순교 현장을 그린 작품에 램브란트는 자신을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성난 군중의 한 사람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그린 작품에는 탕자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보여드리고 있는 이 작품들, 십자가에 달리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지시는 예수님을 그린 작품들 속에도 램브란트는 자신을 역시 그려 넣었습니다. 램브란트는 왜 자기 자신을 자신의 그림들에 이렇게 그려 넣었을까요?
3. 그것은 램브란트가 자신이 단순히 그 현장에 있었다는 고백을 넘어, 자신이 그 사건의 적극적인 참여자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램브란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는 그 현장에 자신을 그려 넣음으로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다!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사도신경의 고백을 하면서 그 본디오 빌라도가 사실은 내 자신임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드문 듯 합니다.
4. 그림을 다시한번 유심히 들여다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있는 푸른 옷의 인물이 바로 램브란트 자신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시는 예수님을 사다리에 올라 바라보고 있는 푸른 옷의 인물이 바로 램브란트 자신입니다. 램브란트는 자신을 그 그림 속에 포함시키며 “나도 거기 있었습니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제가 성난 군중이었고, 제가 무관심한 구경꾼이었고,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비겁한 자가 바로 ‘나’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구주의 십자가 아래 어떤 사람으로 오늘 서계십니까? 무관심한 구경꾼? 도망친 비겁자? 성난 군중의 한 사람? 입니까? 아니면 램브란트와 같이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까?
5. 램브란트는 그의 그림을 통해 회개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림을 다시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일을 사다리에 올라가 가장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어떻게서든 만회하고픈 후회의 몸부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러한 우리의 마음도 늦었다 하지 않으시고 언제든 받아주십니다. 특별히 맨 오른쪽 사진을 보시면, 램브란트는 그림 속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님을 사다리에 올라 촛불을 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애도하는 의미가 아닐까요? 동시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영광 가운데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요?
6. 이 그림을 보며 찬송가 147장(구136장)이 떠오르는 것은 저 혼자만일까요?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Were You There When They Crucified my Lord.”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오!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이 찬송가는 우리가 우리 주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장면을 마치 영화를 보는 관람객처럼, 또는 TV를 시청하는 시청자처럼 어느정도의 일정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내가 가롯 유다가 되어, 내가 유대종교지도자가 되어, 내가 빌라도가 되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는데 앞장선 죄인으로서 십자가를 대면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이렇게 고백해야만 합니다. “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저주한 자가 바로 제 자신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바로 제 자신입니다.”
7.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다니며 복음성가 가수로 널리 활동하던 빌 만(Bill Mann)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가 어느날 복음성가 공연을 은혜와 감동 가운데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그곳에 한 여인이 그녀를 안내하는 분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요 소경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빌 만(Bill Mann)에게 마지막에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불러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노래가 바로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였습니다.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빌 만은 그녀 앞에서 그 노래를 부릅니다. 그 때 그 여인은 벙어리요 귀머거리였기 때문에 손가락을 말하는 사람의 입술과 성대에 대고 떨림으로 그 노래를 듣게 됩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그녀는 눈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통역사를 통해 그녀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I was there!" "I was there!" "I was there!" “네, 나는 거기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던 그 여인의 이름은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였습니다. 헬렌 켈러는 고백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로 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죄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곳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8. 바울 사도는 자신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생명(부활)에 참예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빌 3:10-11).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그 십자가의 자리에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으로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영원하신 부활의 생명 가운데 참여할 수 있는 의로움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복된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 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장 저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램브란트와 같이, 헬렌 켈러와 같이 그 십자가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는 가장 복된 사람들이 됩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네, 주님, 저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Yes, I was t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