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소망] 나들목 V. 부활절 메세지 #울지마라
최고관리자
0
4633
2022.04.19 08:41
"울지마라"
1. 스텐리 하우어워스의 <한나의 아이>는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는 그 누구도 고통의 문제에 대해 해석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강조한다. 그러한 시도는 기독교를 하나의 설명 따위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스텐리 하우어워스 말처럼 기독교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2. 기독교가 내어놓는 해답은 해석이나 설명 따위가 아니다. 기독교의 해답은 공감이며 참여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러하다. 우리 주님은 우리 고통의 문제를 해석하고 설명해주는 대신, 십자가에서 우리와 온 세상 만물의 고통에 참여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소망을 선물해주셨다.
3. 즐거움이란 뜻의 나인성, 오늘 그 성문 앞에서 두 행렬이 충돌한다. 생명의 행렬 vs 죽음의 행렬. 예수님과 그 뒤를 따르는 무리들이 나인성 가까이에 도달했을 바로 그 때! 다른 한 무리의 행렬이 성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생명의 주권자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히2:14)의 충돌이었다. 누가 이길 것인가?
4. 이 이야기는 11절. ‘그 후에’로 시작됬었다. 직전의 사건과 연결된다는 암시이다. 바로 직전에 예수님은 백부장의 병든 하인을 고치셨다. 그 사건의 핵심 메시지는 '병고침'이 아니라 ‘권위’였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위와 권세 아래 자신(세속권력)이 놓여져 있음을 고백했고, 예수님은 말씀으로 질병을 치유하심으로 질병이 자신의 권세 아래 놓여져 있음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그 후에’ 오늘 사건이 뒤를 잇는다.
5. 이제 예수님의 권세 아래 과연 무엇이 무릎을 꿇을 차례인가?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 권세를 주장하던 죽음! 그 죽음의 권세가 이제 생명의 주 앞에 무릎을 꿇는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시자, 죽었던 나인성 과부의 독자는 소생한다. 부활이 아닌 소생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마치 영화의 프리퀄처럼 장차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나인성 죽음의 행렬을 막아서시고 죽음의 권세를 무릎 꿇리신 예수님께서는 사실은 모든 인류의 죽음의 행렬을 마주하며 이 땅을 찾아오신 온 세상의 구주셨다.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죽이실 것이다. 온 인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갔던 죽음의 행렬을 완전히 깨뜨릴 것이다.
6. 부활! 바로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약속이자 궁극의 소망이다. 부활! 그 날이 되면, 모든 악인은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입고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부활! 그 날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자녀들의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모든 아픔과 상처 그리고 슬픔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7. 죽음의 행렬을 마주하시며 멈추게 하신 우리 주님은 과부에겐 ‘울지말라’ 하시고, 죽은 청년에겐 ‘일어나라’ 하신다. 울지말라 하신 것은 단순한 아픔에의 공감을 넘어서는 말씀이셨다. 울지말라는 주님의 말씀 속엔 "내가 반드시 너를 울지 않도록 만들어주겠다."는 주님의 의지와 약속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의 고통, 가족과 친구의 눈물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하다. 아무리 진심을 다해도 사랑하는 이들의 아픔, 질병, 상처, 상실의 눈물을 닦아 줄 능력이 없기에 절망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다르시다.
"울지말라" 하신 주님은, 일어나라 말씀하신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기 위해 모든 눈물의 궁극적 원인이자 이유인 죽음의 권세를 무릎 꿇리신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죽이시고, 다시는 울지 않는 ‘부활의 몸’을 우리에게 선물하신다.
8. 어둠이 두려운 이유는 어둠 자체 때문이 아니다. 어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은 찾아온다. 저녁, 귀가하는 사람에겐 집 앞 익숙한 골목의 어둠은 두려움이 아닌 오히려 설래임이다. 거기엔 집이, 가족이, 사랑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둠을 유난히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와 함께 덮은 이불 속 어둠은 두려움이 아닌 오히려 포근한 안정감이다. 죽음 역시 그러하다. 죽음이 두려웠던 이유는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알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가장 짙고 깊은 어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우리에게 밝히 드러내어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두렵지 않다. 울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