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고민] 그렇다면, 그들에게 교회는 충분히 설레는 대상인가? (창29장 20절)
그렇다면, 그들에게 교회는 충분히 설레는 대상인가?
창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사랑하면 헌신이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혹은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될 때, 그 대상을 향해 설레이게 됩니다. 정리의 여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곤도 마리에라는 여성이 이런 책을 썼죠.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집집마다 장롱 속을 뒤져보면 입지도 않는 옷가지들이 쌓여 있는데, 곤도 마리에는 그걸 다 꺼내서 한 곳에 모아놓고 하나씩 안아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것입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나 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런 옷들은 지금 당장 입지도 않고, 앞으로도 입지 않을 게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십시오. 남편은 빼고요.
펜데믹 이후 교회의 도드라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성도들이 돌아오지 않는가?” “왜 성도들은 점점 헌신하려 하지 않는가?” 도대체 왜 일까요? 이유는 너무나 선명합니다. ‘교회가 설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펜데믹 기간에 그들이 변심한 걸까요? 아닙니다. 펜데믹이 그들의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라, 펜데믹이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준 것 뿐입니다. 저는 그런 연약한 믿음의 상태에 놓여진, 영적인 나태와 권태에 빠진 성도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안타까움과 비난은 전혀 다른 것임을 구분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오히려 제 자신과 우리 나들목비전교회를 비롯한 지역 교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그런 성도님들이 돌아오고 싶을 만큼 설레는 매력을 갖고 있습니까? 성도들이 서둘러 다시 돌아와 함께 거하며, 함께 섬기고 싶을 만큼 우리는, 우리의 교회는 그들을 충분히 사랑했습니까?
처음처럼 혹은 예전처럼 헌신하지 않는다고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C.S. 루이스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 강간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강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향한 그들의 마음은 이미 차가워질대로 차가워졌고, 교회를 향한 설렘은커녕 영적 권태가 그들의 마음에는 가득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그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겠습니까?
창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라반을 칠년 동안 섬기면서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던 이유는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다시 돌아와 주님을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게 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비난과 정죄는 답이 아닙니다. 사랑을 부어주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듯, 우리가 그들을 먼저 사랑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듯, 우리가 그들을 먼저 찾아갑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우리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셨듯, 우리가 먼저 그들을 찾아가 그들의 발을 씻겨줍시다. 날카로운 검사의 시선이 아닌 따뜻한 눈빛과 마음으로 그들의 연약함을 보담고, 그들의 삶의 필요를 채우며, 그들의 좋은 친구와 선한 이웃이 되어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다시 교회를 설레임의 대상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다시 교회를 사랑하게만 된다면, 그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올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기에 7년의 수고가 하나도 힘들지 않았듯, 그들도 다시 주님의 교회와 복음을 우리와 함께 아름답게 기쁨으로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함께 간절히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