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묵상. 호세아 2:8-20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설(說).래임(來臨).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설(說).래임(來臨).
성경묵상. 호세아 2:8-20
각 시대, 문화마다 그 사회와 사람들을 움직이는 결정적 동인이 있습니다. 예컨데, 서구 문화권은 양심과 죄책감입니다. 일본은 염치입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며 금기시 합니다. 한국사람들은 눈치입니다. 누가 보고 안보고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린 그냥 안걸리면 됩니다. 그러나 고대 근동은 수치였습니다. Honor and Shame. 지금도 이슬람권에선 명예살인이란 것이 용인되는 이유도 사실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시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씌여진 책임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이 얼마나 음란한지를 고발하시고, 그들의 수치를 이제 다 드러내십니다.(9-10절) 수치가 드러났다는 것은 그 사회에선 회생불능의 망함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들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더 이상의 소망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눈먼 하나님께선 자신을 떠난 음란한 백성을 찾아오셔서 3번씩이나 반복해서 "네게 장가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람피우고 떠난 음란한 배우자에게 자신이 찾아가서 다 용서하고 없던 일로 할테니 처음부터 결혼생활을 다시 시작하자 제안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드러운 말로 타일러서 데리고 간 장소가 거친들(14절)입니다. 왜 거친들일까요? 그곳은 15절에 나오는 출애굽 백성들이 처음 하나님의 언약 체결식을 맺은 광야입니다. 출애굽백성들은 광야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체결식을 맺은 후 하나님과의 동거 즉 신혼을 시작한 곳입니다. 광야는 한눈 팔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눈만 볼 수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만약에 하와이 해변이었다면 음란한 우리는 엄청 곁눈질 했을 것입니다. 대도시였다면 화려함에 눈돌아가다가 신랑에겐 눈길을 안줬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걸 볼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장소, 신랑되신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거친 들(광야) "나만 바라봐"하셨던 그 때, 그곳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수치를 덮어주시고 거기서 비로소 포도원(기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괴로움의 골짜기인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십니다.(15절) 골짜기는 막힌 곳, 갇힌 곳입니다. 신랑되신 하나님을 떠나 다른 남자들과 잘 살아보려 했지만 결과는 고통과 괴로움의 골짜기 아골 골짜기에 갇힌 것이 죄인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골 골짜기도 다시 소망의 문으로 바꾸어주십니다. 당신을 떠나 고통의 골짜기에 갇힌 우리를 끝내 찾아내셔서 우리의 손목을 붙들어 일으키시며 다시 소망의 문으로 함께 나아가자고! 너의 수치를 덮어줄 이 가죽옷(예수님의 생명)을 입고 다시 시작하자고! 우리를 광야로 데려오신 나의 신실한 신랑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만 사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