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서론] 요한계시록을 읽고 묵상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계시록 서론] 요한계시록을 읽고 묵상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1. 요한계시록이 어려운 세가지 이유
1)시대와 문화의 간극이 있기 때문에: 계시록은 2천년 전 상황에서 쓰여진 책입니다. 당시 그 시대, 그 땅의 사람들에겐 어렵지 않은 표현들이 오늘 우리에겐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2)로마의 입장에서 불온문서였기 때문에 외부인들에겐 모호하게 쓰여짐(내부자의 시각에서 읽어야 함): 계시록은 핍박받는 교회가 결국 승리할 것이란 메시지입니다. 당시 교회는 로마당국의 삼엄한 감시 속에 숨죽여 지내야만 했습니다. 교회가 승리할 것이란 메시지를 성도들이 돌려 읽는다면 로마제국 입장에선 상당한 위협으로 느껴졌을 것이 당연하지요. 그래서 이런 메시지를 담은(로마의 입장에선 불온문서인) 요한계시록은 내부자들만이 선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숫자, 상징 등을 사용해서 모호하게 적혀 있습니다.
3)잘못된 우리의 선입견 때문에: 많은 분들이 계시록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처럼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은 미래가 아닌 현재를 위한 책입니다. 핍박받는 교회가 결국은 승리할테니 오늘을 믿음으로 버티고 인내하라고 핍박받고 있는 교회를 위로하고 격력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2. 요한계시록을 읽는 두 가지 키워드: 교회, 십자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항상 2가지 키워드를 떠올리시길 바랍니다. 첫째는 교회고 둘째는 십자가입니다.
1)다시 말씀드리지만, 당시 교회는 세상 그 자체였던 로마의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로마를 꺾고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암담한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밧모섬의 사도요한에게 결국 교회가 승리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셨고, 그것을 묵시문학의 형태로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2)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승리할까요? 로마보다 강한 힘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교회는 승리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십자가로 승리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양이 부활하시어 온 세상의 통치로 다시 오시는 날, 바로 그 종말의 시간이 교회의 최후승리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교회는 로마황제의 길이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꿋꿋히 걸어가야 합니다.
3. 먼저 풀어야 할 두가지 오해
1)문자주의 강박: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선입견이라고 했습니다. 대표적인 선입견 중 하나가 요한계시록의 기록들을 문자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김동명 시인의 "내 마음은 호수여 그대 저어오오"라는 시를 읽고 나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아, 시인의 몸 어딘가에 물이 찼나보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뭔가 좀 모자란 사람이라 생각할테지 말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신천지 이단이 14만 4천을 구원받는 사람들의 총수로 문자그대로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14만 4천 안에 들기 위해선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고 하며 사람들을 가스라이팅 하는데, 그런 해석 방식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14만 4천은 정해진 숫자가 아니라 상징입니다. (계시록 초반에 일곱 교회에 메시지를 주실 때 나오는 표현인 '일곱 촛대', '일곱 별'이 상징이듯 말입니다.) 14만 4천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아십니까? 헬라어 성경을 보면 그들은 남성명사로 되어 있습니다. 즉, 남자들만 구원받을 수 있게 된단 말입니다. 게다가 계 14:4은 그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렵히지 안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들"이라 했기에, 기혼남성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럼 비혼남성, 총각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정말 웃기지도 않는 교리가 되어버는 거죠. 14만 4천은 신.구약 전체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총수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상징하는 숫자일 뿐입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 12 x 신약의 열두 제자 12 x 무한대를 의마하는 1000 = 14,4000)
2)상징에 대한 잘못된 이해: 요한계시록은 위에 말씀드린 이유들 때문에 상징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그 중 숫자를 사용한 상징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그 무시무시한(?) 666입니다. 그동안 많은 이단들이 이 666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바코드가 666이다, 베리칩이 666이다, 코로나백신을 팔목에 맞으니 그게 666이다 등등 그런 류의 이야기들을 많이 했고, 또 그걸 많은 성도들이 분별력 없이 듣고 쓸데없는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666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13:1)은 666은 짐승의 수라고 선명히 밝힙니다. 짐승은 다니엘서(요한계실혹이 많은 상징을 빌려온 성서)를 보면 하나님나라를 대적하는 세상세력을 뜻하고, 그 짐승의 두드러진 특징은 '파괴적인 폭력성'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세력은 언제나 파괴적이고 폭력적입니다. 자, 계시록이 쓰여진 당시의 시대로 잠시 돌아가볼까요? 그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를 핍박하며 파괴하는 대표적인 세상세력은 무었었습니까? 로마제국 그리고 그 수장인 로마의 황제들이었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네로'였습니다. 그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의 알파벳에 부여된 숫자로 이름을 대신하여 부르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관습을 게마드리아(gematria)라고 불렀는데요, 게마드리아를 적용해 네로황제를 히브리어로 음역(*네론 카사르)하여 그 알파벳을 더해보면 정확히 666이 됩니다. 즉 666은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핍박하는 짐승같이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세상권력을 상징적으로 의미했던 것이죠.
게다가 6이란 숫자는 완전수 7에 가깝지만 절대로 7이 될 수 없는 숫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적그리스도(그리스도의 통치를 대적하는 세력)의 두드러진 특징은 예수님을 모방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13장의 짐승의 특징 중 하나가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고,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아서 사람들의 경배를 받는 모습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영광을 그대로 복사한 듯 합니다. 하지만 그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것 뿐입니다. 이러한 짐승의 흉내, 모방을 상징하는 숫자가 바로 요한계시록의 666이란 숫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666은 무엇일까요? 한 사람, 한 가지 대상으로 특정지어서는 안됩니다. 666은 짐승의 수로, 계시록이 쓰여진 당시 666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대표자 '로마의 황제, 권세'였다면, 지금 우리를 십자가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고 떨어지게 하려는 세력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되는 666의 도전입니다. 오른손과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는 명령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지배하려 했던 짐승의 세력에 종속된 노예가 되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노예들은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이마나 오른손에 주인의 고유한 표를 새겼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노예가 누구의 소유인지를 드러냈던 것이죠. 그러므로 지금 우리 시대에 이마나 오른손에 짐승의 표 666을 받지 말라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믿다가 결국 핍박을 못이겨, 유혹을 못이겨 황제숭배 사상에 굴복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의 황제숭배사상! 전 그것은 단연코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에 종속된다면 그것이 바로 이마와 오른손에 666 표식을 받은 것입니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묵상하기 전에 온 교회는 어떤 관점과 시각을 바탕으로 이 성경을 읽어야 할지 바른 선이해를 갖길 원합니다. 글이 다소 어려우셨다면, 딱 '두 단어'만 기억하십시오. <교회와 십자가>. 오늘 우리의 현실은 핍박과 유혹 속에 흔들리는 연약한 교회지만, 교회는 십자가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흔들리는 교회, 그러나 결국 십자가로 승리하는 교회. 이 승리의 메시지를 통해 험난한 믿음의 길 위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으시고 끝까지 인내하며 충성하는 우리 교회와 온 성도들 되시길 어린양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