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예수생명] 욕망을 담은 금그릇, 보배를 담은 질그릇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정말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까?
아무나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후 4:7-12절에는 우리와 너희가 나옵니다. ‘우리’는 바울와 선교팀이고, ‘너희’는 고린도교회입니다. 그 우리가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고후4:7). ‘너희’는 우리라는 질그릇이 깨어져서 그 안에 담겼던 보배가 흘러나와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너희’에서 ‘우리’로 옮겨간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깨어짐과 희생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금그릇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금그릇이 되려는 속내는 결국 썩어질 욕망을 가득 담고 싶기 때문입니다. 금그릇이 되어서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수는 있겠지만, 생명을 나누어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그릇 같은 자신이 복음의 수고와 사랑의 희생으로 깨어질 때 그 안에 담긴 보배 즉 예수의 생명이 흘러나와 다른 사람을 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되느냐,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담고 있느냐만이 중요합니다. 욕망을 담은 금그릇이 되길 원하는지,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 되길 원하는지 우리는 점검해야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를 christendom(기독교왕국)과 christianity(기독교공동체)로 구분합니다. 기독교 왕국의 길을 걷는 기독교는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군림하려 했습니다. 즉, 금그릇이 되려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십자군전쟁과 같은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고, 지금도 유사한 죄들을 서슴없이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기독교공동체의 길을 걷는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따라왔습니다.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로 나아가 스스로 낮아졌고, 지배와 군림이 아닌 낮아짐과 섬김의 길을 걸었습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 되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입니다. 예수님은 질그릇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질그릇을 산산히 깨뜨려 생명을 온 세상에 흘려보내셨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Christianity의 가장 큰 적은 이 세상이 아니라 Christendom이라 했습니다. 백번 동의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내재해 있습니다. 바로 세속적 욕망입니다. 금그릇이 되어 썩어질 욕망을 가득 채우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금그릇 되길 바라는 마음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질그릇 같은 연약한 인생에 예수의 생명이라는 보배를 담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