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력] 說.來臨. 악이 신자의 마음을 훔치는 과정 (feat. 마음을 훔치는 자 압살롬)
說.來臨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삼하 15:1-13)
[분별력] 악이 신자의 마음을 훔치는 과정 (feat. 마음을 훔치는 자 압살롬)
한국말 중에 외국인이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표현이 있다고 합니다. “잘먹고 잘살아라.” 분명히 둘다 좋은 말, 축복의 말입니다. 옆에 계신분께 활짝 웃으며 인사하시겠습니다. “잘먹고 잘사세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분명 둘 다 좋은 말, 축복의 말인데.. 둘을 붙여 놓으면 어떻게 말해도 이건 좋은 뜻이 못됩니다. 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해도 한국인이라면 기분이 더 나쁘면 나빴지 좋게는 안들립니다. “잘먹고 잘살아라.” 이 말의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이 그렇습니다. 악은 공포영화에 나오는 흉측한 모습, 입에 칼을 물고 피를 뚝뚝 흘리는 섬뜩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악은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을 빼앗길만 한 매력적인 겉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송현 시인이 쓴 ‘어느 쥐의 유언’이란 글이 있습니다. 쥐들의 마을에서 하루는 가장 현명한 쥐가 죽기 전에 후배 쥐들을 모아놓고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 말 귀담아 들어라.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은 저마다 다른 무서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중에서 무서움의 형식을 감추고 있는 무서움이 가장 무서운 무서움이다. 내말 잘 알아들어라. 고양이와 쥐덫이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로 있고, 쥐덫은 언제나 쥐덫으로 있으니 내 나이쯤 되면 고양이쯤이야 차라리 같이 늙어가는 이웃일 수 있고, 쥐덫쯤이야 내 지혜의 시험대 정도로 그친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고양이도 아니고 쥐덫도 아니고 무서움을 다채롭게 위장한 ‘쥐약’이란다. 쥐약의 외형은 탐욕의 혀끝과 코끝을 유혹하기 위해 자연스럽고 믿음직스럽고 우호적이고 헌신적이다. 그러나 쥐약의 외형이 어떻게 바뀌든 쥐약은 쥐약이다. 이 바보들아!”
쥐약의 외형이 쥐들에겐 그렇듯, 악의 외형은 우리 영혼의 혀끝과 코끝을 유혹하기 위해 자연스럽고 믿음직스럽고 우호적이고 헌신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한채 쥐약인지도 모르고 덥썩 물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정확히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압살롬의 반역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얼굴천재 압살롬은 아버지의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자였습니다.
압살롬이 마귀라던가, 악 자체는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마음을 훔치는 악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악이 신자의 마음을 교묘히 점령해가는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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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은 부지런합니다.
2. 악은 매력적입니다.
3. 악은 지혜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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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에겐 ‘분별력’이란 ‘덕목’이 정말 필요합니다. c.s.루이스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의 마음과 어른의 머리를 요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어른의 머리란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분별력은 사랑이나 겸손이나 온유나 정직과 같은 하나의 ‘덕목’입니다. 분별력이 없다는 것은 아쉬움 혹은 안타까움을 넘어 ‘악한 것’에 가깝다는 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선은 언제나 악을 물리치지만, 게으른 선은 부지런한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부디, 덕목으로서의 분별력을 잃지 않기 위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나태히하지 마십시오. 진리의 말씀 앞에 더욱 부지런히 나아가십시오. 부디, 선한데는 지혜롭고 악한데는 미련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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