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시간에 졸지말자 ?] 유두고의 살아남이 큰 위로가 된 이유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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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1 14:41
유두고의 살아남이 큰 위로가 된 이유
1. 그날 바울 사도의 설교가 엄청 길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기~이~인 설교 중 창문에 걸터 앉아 말씀을 듣던 유두고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습니다. 의사 누가의 증언이니 잠깐 기절한 게 아니라 확실히 죽은 게 맞겠죠. 말씀 집회 중 대형 사고가 터진 겁니다.
여기서 케케묵은 책임론이 등장하곤 합니다. 설교를 길게 한 바울의 책임이다 vs 설교 시간에 졸은 유두고의 책임이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행20:7-8)
바울은 지금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수리아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라는 표현에서 그날 따라 설교를 길게 하신 바울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어떻게든 성도들께 말씀 하나라도 더 주고 가고 싶은 마음. 그것이 설교자의 사랑 아니겠습니까?
3. 유두고 청년은 왜 창문에 걸터 앉아 설교를 듣고 있었던 것일까? 위험하게시리. 여기엔 부정적 가설과 긍정적 가설이 있습니다.
[가설-1] "영성에 문제 있어?"
영적인 상태에 문제가 있으니 말씀듣기를 힘들어 하고, 설교시간에 자꾸 졸고, 그러다 떨어졌다는 겁니다. 전 개인적으론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소시적에 4층 창문에서 떨어져봤는데요. 말씀듣다가는 아니고 술에 취한채 떨어졌었네요. 솔직히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부모에게 끌려 왔든, 누구에게 초청받아 예의상 그 자리에 와 있었든, 말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 피곤하면 거기 안있습니다. 진작에 거기서 나와도 나왔지. 안 그런가요? .
[가설-2] "졸음을 이기기 위해서"
유두고란 이름은 행운, 다행이란 뜻으로 당시 노예, 종들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객관적인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튼 그것이 사실이라면 유두고는 저녁 집회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는 있었던 것 같네요. 잠시 노예(종) 유두고의 하루 일과를 상상해보면, 그는 분명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주인의 집을 위해 하루 종일 고된 일과를 보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지칠대로 지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바울사도의 그곳에서의 마지막 날 집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가 밤이 깊도록 길어지면서 유두고 청년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쉽게 상상이 가지요.
게다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들이 모인 윗 다락엔 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등불이란 것이 태우면 태울수록 산소를 빼앗아 그 안에 사람들은 쉽게 졸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음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청년 유두고는 졸음을 이기보려고 그래도 신선한 공기가 통하는 창가로 나갔던 것 같습니다. 이런 가설이라면 유두고는 참 기특한 청년입니다. 어쩌면 드로아 교회 청년부 회장님이셨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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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두고의 살아남은 왜 그들에게 위로(단순한 놀람이 아닌)가 되었을까?
분명한 것은 유두고는 그 창문에서 떨어졌고, 죽었고,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사람들에게 굉장히 큰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행20:12)
사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이라면 크게 놀라고 오히려 두려워했다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은 그 일을 목격하며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 어떤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분명 유두고를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정말 노예였다면, 거친 일과를 겨우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어 예배의 자리로 달려온 유두고 청년이 사람들의 눈에 얼마나 어여삐 보였을까요? 단지 그날 하루만의 일이 아니라, 늘 유두고 청년은 그런 교회의 보배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설령 그가 노예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야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 합니다. 사람들은 평소 유두고 청년을 참 귀하게 여겼음이 분명합니다. 그 귀한 청년이 오늘도 말씀을 사모하다가 (졸음을 이기기 위해, 어쩌면 편안한 자리를 사람들에게 양보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고, 사람들은 너무나 안타까워했고, 그 청년이 살아나자 그 기적 앞에서 사람들은 놀라움을 넘어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