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래임 說.來臨 묵상]. (은혜). 삼하 6:1-11.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웃사를 꼭 죽이셔야만 했나요?)

[설래임 說.來臨]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설래임 說.來臨 묵상]. (은혜). 삼하 6:1-11.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웃사를 꼭 죽…

최고관리자 2 20960

[설래임 .來臨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은혜). 삼하 61-11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웃사의 죽음

1. 제겐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해가 안되면 답답한 것도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오늘 사무엘하 6장의 웃사의 죽음입니다.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천도한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바알레유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 했습니다. 그런데 도중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웃사가 언약궤를 붙들어서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삼하 6:7은 웃사가 잘못함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임을 밝힙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비롯한 성소의 성물들은 반드시 레위인들이 어깨에 매어 옮기도록 명령하신 바 있습니다(4:15).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날 때 언약궤는 수레에 실려 옮겨지고 있었고, 도중 수레를 끌던 소들이 갑자기 뜀으로(영어성경 NIVstumble 넘어지다로 해석함) 언약궤가 행여 땅에 떨어질까 웃사가 언약궤를 붙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웃사를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2. 이 장면에서 교훈을 받는 것과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교훈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우리 신앙생활의 안녕을 위해서 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위해서 말하지만 꼼수를 부리고, 무례와 심지어 불법을 자행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피할 수 없게 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웃사의 죽음

3.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웃사의 죽음입니다. 아무리 웃사가 잘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은 꼭 그렇게 죽이셔야만 했을까? 여러 주석을 찾아보고 아무리 묵상을 해보아도 솔직히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언약궤의 귀환을 주도한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리고 삼하 6:1을 보면 다윗이 그 현장에 함께 간 무리의 수가 자그만치 3만명입니다. 잘못의 책임이 있다면 다윗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이고, 그 현장에 함께 한 3만명 역시 책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다윗도, 그중 누구도 손들고 이거 잘못됬다.’, ‘언약궤는 수레가 아니라 레위인들이 어깨에 매야 한다.’ 그것이 율법이다라고 저지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마디로, 웃사만 율법을 무시한 나쁜 놈이 아니라, 다 똑같이 나쁜 놈인데 웃사만 죽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진짜 질문: 그들과 우리는 왜 살려 두셨을까?

4. 믿음연습(Facing your giants)이란 책을 보면,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 역시 이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다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전통적인 유대 랍비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구약에 능통한 조 슐람(Joe Shulam)에게 도대체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물었다 합니다. 그런데 조 슐람은 대답 대신 오히려 질문을 합니다. “The question is not why did God kill Uzzah but rather why does he let us live?”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 웃사를 죽이셨나가 아니라, 왜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두셨는가? 라는 것입니다.

 

은혜, 충성

5. 언약궤의 귀환을 진두지휘하던 다윗도, 그 현장에 있던 삼만명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지 않는 우리 모두도 웃사와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 웃사만 죽었는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내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 은혜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주변의 웃사를 비난합니다. 마치 그 혼자만의 잘못인 것처럼 그를 정죄합니다. “그러니까 벌 받은 거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것 아니겠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은 웃사와 다르다는 교묘한 우월감의 표현입니다.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웃사는 하나님의 공의로 죽임을 당한 것이고, 그 현장의 다윗과 삼만명과 그리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림을 받은 것입니다. 죽어 마땅한데 은혜를 입어 살려주셨으니, 이제 더욱 주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으로 바르게 그리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모셔야 겠습니다.

 

2 Comments
김나리 2020.08.28 21:29  
Amen!
최고관리자 2020.08.31 19:12  
Bless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