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누구일까요?

[설래임 說.來臨]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누구일까요?

최고관리자 0 849
@복음서에서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몇명일까요? 분명한 건 1명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둘? 셋? ......
 
A. 마태와 마가와 요한은 베다니에서의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분명 갈릴리에서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장소의 이름이 시몬의 집이라고 해서 헷갈릴 수 있는데, 나병환자 시몬과 바리새인 시몬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B. 게다가 마태, 마가, 요한복음의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베다니의 한 여인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 이름을 감추었지만 요한은 그녀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임을 밝힙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갈릴리 그 동네에서 죄를 지은 한 여자이며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덧1. 찬송가 오류 (사실, 그녀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닙니다.)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이 가사의 막달라 마리아는 분명 오류가 있습니다. 이 찬송의 작사가이신 에드윈 폰드 파커 목사님(1889년,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목회 중 작사)이 뭔가 헷갈리신 것입니다. 마리아라고 한다면 막달라가 아니라 '베다니 마리아' 본받아서 라고 했어야 맞고, 눅 7장의 여인이라면 이름이 없는 것이 맞습니다.
 
-덧2. 무지 혹은 왜곡으로 시작된 오류 (@막달라 마리아, 미안해요.)
많은 사람들이 눅 7장의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소위 '그레고리우스의 무지 혹은 오류' 때문입니다. 59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고해성사로 죄사함받음을 강조하려다 눅 7장의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라 설교했고, 게다가 그녀는 전직 창녀였다 주장했습니다.(아래 그의 설교 내용 참조). 이것은 심각한 왜곡이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눅 7장의 옥합을 깨뜨린 이 여인을 요한복음의 베다니 마리아와 혼동했고, 지역은 또 갈릴리이니 일곱귀신 들렸다가 예수님께 고침받은 또 다른 마리아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를 그냥 단순무식하게 연결시켰던 것 같습니다. 여기까진 그래요 헷갈릴 수 있다 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눅 7장의 '동네에서 죄 지은 과거가 있는 옥합을 깨뜨린 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연결시키려다보니, 일곱귀신 들렸었던 막달라 마리아의 과거를 아무 근거없이 죄와 연결시켜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일곱귀신이었으니 완전 수 일곱과 또 연결되어 얼마나 큰 죄였겠냐 하며 용감하게(?) 그녀는 막달라 마리아였고 전직 창녀였다!는 말도 안되는 왜곡을 하게 된 것입니다.
 
C.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 대한 누가의 기록은 분명 다른 세 복음서의 기록과 다른 에피소드가 분명합니다. 사실 이에 대한 이견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마태, 마가의 기록과 요한의 기록에는 뚜렷한 차이(향유를 부은 위치가 다름, 시기(유월절 이틀전, 유월절 엿새전)가 다름)가 있기에 베다니에서의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한명인지 두명인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동일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1) 마태와 마가는 그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엇다고 했는데, 요한은 그 여인이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고 합니다. 사실 이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두 똑같은 사건을 동시에 함께 목격했다면, 우리가 그 사건을 다 똑같이 기억하고 기록하지는 않을 겁니다. 모두 각자의 각자의 눈에 더 중요하게 보이는 것이 있고,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을 각자 취사선택하거나 강조해서 기록하는 것은 그냥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향유를 부엇다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2) 유월절 이틀전? 유월절 엿새전?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얼핏보면 이 일이 마치 유월절 이틀전에 일어난 일 같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문맥을 자세히 보면, 마태.마가의 옥합을 깨뜨린 이 여인에 대한 기록은 저자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삽입절insertion clause'로 들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앞뒤로 '살해음모' 안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마가복음으로만 설명하자면 막 14:1-2절은 곧바로 10-11절과 연결하는 것이 문맥상 더욱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몇일 전에 있었던 일의 '회고'로 본다면, 마태.마가의 기록과 요한의 날짜 기록에 차이가 있는 것이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더 상세한 설명을 원하시면 다음 링크를 참조해주셔요.
 
cf.,
“....... 막달라 마리아는 누가가 죄인이라 부르고 요한은 마리아로 부른 여인입니다. 마가는 그녀를 일곱 귀신이 나간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이 일곱 귀신은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이 여인은 금지된 성적인 행위를 위해, 자신의 몸에 향수를 뿌리기 위해 이 향유를 사용해왔습니다. 그녀가 부끄럽게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사용한 것을 이제 칭찬받을 만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바치고 있습니다. 그녀는 세상의 눈으로 욕망의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고해성사와 회개로 세상 욕심이 눈물로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내보이기 위해 머리카락을 치장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눈물을 닦습니다. 그녀는 입으로 자신을 자랑하였지만, 이제는 주님의 발에 입 맞추고 자신의 입을 대속자의 발 위에 갖다 댑니다. 그녀는 모든 쾌락을 자신을 위해 사용했지만, 이제는 자신 스스로 불태웁니다. 그녀는 수많은 죄를 덕으로 바꿔 하나님을 고해성사로 회개하고 섬깁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40개 설교, 제 33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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