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구원은 하나의 이야기

창조와 구원은 하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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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구원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창조하다'는 동사는 오직 하나님을 주어로 해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창조하다(바라)' 동사의 가장 빈번한 쓰임은 창세기에서가 아닌,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하나님의 백성 중에 일어난 예언/목회 사역에서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cf., '창조하다' 이 동사는 창세기의 창조의 이야기에는 6번 나오는 반면, 이사야의 설교에는 무려 17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의 함의(含意)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태고적의 단회성 사건이 아닌 현재진행형 사건이며, 모든 혼돈에 질서를 그리고 모든 어둠에 빛을 비춰주시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주전 6세기, 히브리 백성들이 처한 현실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벨론 대제국의 힘에 압도당한 그들은 모든 것을(문자 그대로) 잃었고, 그들 중 다수는 참담한 포로가 되어 거의 1,000km나 되는 광야를 강제로 건너 낯선 땅으로 끌려왔습니다.
바로 그런 절망적 현실을 매일같이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던 그들에게 '창조하다'는 동사는 과연 어떤 느낌으로 들려왔을까요?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선지자 이사야의 입술을 통해 그 많고 많은 단어들 중에 '창조하다'는 단어를 그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했을까요?

첫째, 창조는 성령께서 지금도 하고 계시는 일임을 그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둘째, 창조의 세계는 비인격적 환경이 아닌(즉, 우리의 현실과 상관없는 시공간이 아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집이요, 삶의 터전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출렁이는 절대적 혼돈과 깊은 흑암 속의 절망. 그러한 현실을 매일같이 살아가던 이들에게, '창조' 말고는 도대체 다른 소망이 어디에 있으며, 무(無)에서 생명을 창조해내신 하나님 외에 도대체 다른 구원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창조의 이야기는 곧 구원의 이야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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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유진 피터슨, "현실, 하나님의 세계". (pp.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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