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 진리 안에서의 똘레랑스(Tolerance)
유다서 14-23절 “진리 안에서의 똘레랑스(Tolerance)"
1. 유다서는 가만히(교묘하게)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거짓 진리(혹은 유사 진리-이단)로부터 복음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의 교묘한 책략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그들은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습니다.
2. 거짓교사들의 첫 번째 특징: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려 함”
당시 일부 거짓교사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 사상을 은혜의 복음과 교묘히 결합시키려 했습니다. 그 결과 영은 은혜로 이미 구원받았으니, 어짜피 악하고 사라질 육체는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는 경건치 못한 생각들이 교회 안에 팽배했습니다. 그들은 은혜로 구원받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계명을 붙들고 씨름하며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던 참된 신자들을 오히려 ‘은혜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부족하다고 조롱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구원파식의 복음 이해와 유사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런 식의 ‘은혜의 복음’에 대한 이해는 성경에 대한 오해요 더 나아가 모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열매로 알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취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진실한 것인지 우리는 열매로 반드시 확인해야만 합니다. 육체의 정욕대로 마음껏 살아가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고 회개의 열매도 맺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거짓된 것임이 선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구원얻는 진실한 믿음은 거룩과 경건의 열매가 나타나야 하고, 우리가 연약해서 그러한 열매가 좀처럼 맺혀지지 않을 때라면 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회개하는 열매가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한 것입니다.
유다는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들을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 정욕대로 사는 자들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그 은혜를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육체와 본능과 정욕을 거슬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죄 된 본성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심히 부패하여 자신을 그대로 방치하면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삶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경향성이요 심각성입니다. 우리가 진정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제 우리는 천국행 티켓은 이미 손에 쥐었으니 마음껏 살아보자가 아니라, 더욱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거룩한 삶을 살려고 분투해야만 합니다. 은혜로 구원 얻은 자들은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딤4:7-8).
3. 거짓교사들의 두 번째 특징: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함”
사단의 최종 목적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홀로 하나이신 주권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무너지면, 기독교는 조금도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근대 서구 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은 ‘똘레랑스’입니다. 프랑스어 똘레랑스는 영어로 ‘tolerance’, 한국어로는 ‘관용’으로 해석이 되지만 그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관용은 전제가 내가 맞고 옳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한 너를 내가 너그럽게 받아주겠다는 것이 바로 관용(tolerance)입니다. 그러나 똘레랑스는 그 전제가 누가 맞고 틀렸다는 개념이 아예 없습니다. 똘레랑스는 내가 도무지 이해가 안되고,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지라도 상대방의 생각, 가치, 행동을 그대로 존중하여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나도 맞고, 너도 맞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갖는 것이 바로 똘레랑스입니다. 혹자는 똘레랑스야 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놓쳐서는 안 될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똘레랑스 정신을 우리 사회와 개인적 삶의 모든 영역에 그대로 다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진리의 영역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기독교 복음의 진리는 구원의 길은 오직 한 길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과 의견이 함께 정답이 될 수 있는 똘레랑스 정신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오직 이것만이 정답이고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인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모든 길이 다 참된 길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에는 열광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역에서도 똘레랑스를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진리, 하나의 표준이 사라진다면 그 사회는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도 맞고, 너도 맞고, 모두가 다 맞는데 어떻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법이 존재할 수 있고, 표준적 윤리와 도덕이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똘레랑스 안에서 동성애를 받아들인다면, 소아성애는 왜 안되고, 일부다처제는 왜 안되며 근친결혼은 왜 안되겠습니까? 이미 이러한 인류의 도덕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주장들이 도처에서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어떤 영역에서는 서로의 생각과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똘레랑스 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똘레랑스 정신이야말로 민주주의 사회를 발전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저 역시 믿습니다. 특별히 지역감정과 색깔론으로 양극화되어가는 우리시대의 대한민국 사회에는 이 똘레랑스 정신이 너무나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역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기준이고, 그 핵심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입니다.
4. 교묘히 들어온 자들의 속마음, 그들의 실체: 세 구약 인물의 예
이제 유다는 구약성경에서 세 명의 예를 들며 이렇게 교묘히 들어와 진리를 훼손하는 자들의 속마음과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가인, 발람, 고라입니다. 창세기 4장 5절을 보면,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자 몹시 분노합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정당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주권자라는 철저한 자기중심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다른 생명 자신의 혈육 동생까지도 살인하는 비극을 불러일으킵니다. 발람은 베드로의 지적처럼 불의의 삯을 사랑해서(벧후 2장)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으로 이끌었던(계2:14) 사람이고, 고라는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무시했던 사람이었습니다(민 16장). 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결국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자신이 주권자가 되길 원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교묘히 침투해 들어온 거짓 교사들의 속마음이 바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5. 여전한 도전과 우리의 응전
우리 시대, 우리 교회 역시 이와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첫째, 자신을 믿음 위에 굳건히 세워야 합니다(20절). 자신이 서 있는 믿음의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교묘한 가르침에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경건의 훈련에 더욱 매진하고, 매일 성실히 진리의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진리에 대한 민감한 분별력을 구비해야 합니다.
2) 둘째, 믿음이 연약한 지체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22절). 1mm도 양보도 타협도 할 수 없는 진리의 전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나 나와 다른 이에게 똘레랑스 정신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특별히 연약한 형제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셨듯 말입니다.
3) 셋째, 죄를 미워하되, 죄인은 긍휼히 여기며 은혜의 복음을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23절). 우리는 특별히 여기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전쟁에 열심히 참여하다보면 잘못하다간 “걸리면 다 죽어!”가 우리의 구호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기 자녀한테 교회 안 나가고 있다고 “이 독사의 자식아!” 이러기도하고, 아직 제사 지내는 형제한테 “이 악한 사단 마귀야 물러가라!” 그러기도 합니다. 이건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똘레랑스를 행하셔야 합니다. 그들을 미혹하고 있는 배후의 사단을 미워해야지,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긍휼이 여기며, 그들에게 겸손한 입술로, 사랑과 섬김의 삶으로 복음을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
6. 에녹의 하나님과 동행한 300년
유다는 창세기에는 기록되지 않는 에녹의 하나님과 동행한 300년의 행적을 아주 간략하게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유다서 14-15절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은 승천하기 직전까지 300년 동안 불경건한 세상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던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은혜의 기회를 선포하는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특징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7.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관용)를, 모든 일에는 자비를(!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 우리는 진리를 위해서는 용맹한 투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진리의 영역 밖에서는 언제나 긍휼과 자비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 싸우다 모두를 물어뜯는 싸움닭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전선을 1mm도 양보할 수 없지만, 진리의 전선 밖에서는 우리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똘레랑스를 행하며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에녹의 300년이 그랬습니다. 에녹은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나들목 비전 교회의 성도님들도 모두가 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