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론] [욥의 고난] 까닭없는 고통, 까닭없는 은혜 #신정론(神正論, theod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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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8 22:02
까닭없는 고통, 까닭없는 은혜
1. 이 세상에는 인과율로 시원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고통이 문제 역시 그렇습니다. 적어도 욥의 고통은 까닭없이 찾아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항변하고, 항의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런 욥을 충조평판으로 교정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이 적어도 그들보다 옳다 판정해 주십니다.
2. 고통의 문제는 인과율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속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적어도 우린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해석하는 잔인함에선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과율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비단 이 세상에 난무하는 고통의 문제뿐만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분명 편재하는 '사랑과 은혜' 역시 그렇습니다. 고통의 문제도, 은혜의 사건도 모두 신비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3. 고통 중에 항의하는 욥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곤 욥에게 폭포수와 같은 질문들을 쏟아부으십니다. 그 중의 한 질문입니다.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는가?", 하나님은 왜 사람 없는 광야에도 그 아까운 비를 내리실까요? 솔직히, 낭비라는 느낌은 들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4.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왜 불의한 자들에게도 비를 내려주시고, 악인에게도 해를 비추시는 걸까요? 솔직히, 안 그러셨으면 좋겠는데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5.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이해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은 분명 잘못하면 벌을 받는 인과응보라는 인과율을 초월하는 사랑과 은혜의 법칙입니다. (물론 여전히 악인에겐 비도, 빛도 안주시면 좋겠지만 말입니다.)
6. 하나님은,
까닭없이 고통을 세상에 허용키도 하시지만,
까닭없이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베풀고 계십니다.
7. 까닭없는 고통을 만나면, 우리는 신의 정당성에 대해 항의합니다. 하지만 까닭없는 은혜에 대해선 누구도 신의 정당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인생 중 조우하는 고통에 대해선 조밀한 설명과 이해를 요구하지만, 온 세상과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덮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선, 우린 의문하는 법이 없습니다. 마치 내게 고통은 부당하고, 은혜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8. 욥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는 욥이 겪은 까닭없는 고난에 대해 끝까지 시원하게 설명해주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욥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게 된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욥이 눈으로 뵈옵게 된 하나님의 얼굴은 자신을 죽이려 맹렬하게 달려드는 용사의 얼굴이 아닌, 세상을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은혜의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9. 어린아이에게 놀이동산은 천국입니다. 하지만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에게 놀이동산은 곧 지옥이 됩니다. 그 아이에게 유일한 위로와 해답은 해석이나 설명 따위가 아닙니다. 엄마의 얼굴입니다. 엄마의 얼굴을 다시 보게되는 순간 그 아이는 아무 설명 없이도 곧 천국을 되찾게 됩니다.
10. 욥기의 결말은 까닭없이 당한 욥의 고난에 대해 그럴듯한 설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욥기의 결말은 고통의 한복판에서 신음하는 작은 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관심을 두시고 찾아오시며 그 얼굴을, 그 사랑과 은혜의 얼굴을 비춰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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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를 만나 괴로움 에 떨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욥을 찾아와 보여주셨던 당신의 얼굴, 그 사랑과 은혜의 얼굴을 그들에게도 속히 비춰주시길 간구합니다. 고통의 한복판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들이 끝내 하나님의 사랑의 얼굴을 뵈올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의 교회가 넘어진 그들을 부축하고 상처를 싸매어주며 끝까지 그들의 곁을 지키며 위로하는 진실한 친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신정론(神正論, theodi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