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아즈카라, "부분을 드렸는데 전부를 받으셨다니요?"

[헌신]아즈카라, "부분을 드렸는데 전부를 받으셨다니요?"

나들목 0 4150

아즈카라, “부분을 드렸는데 전부를 받으셨다니요?”

#부분을전부로받아주시는하나님 #아즈카라(기념물) #중심을드림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He shall take out the memorial portion from the grain offering and burn it on the altar as an offering made by fire, an aroma pleasing to the LORD." -레(Lev)2:9.

온전한 헌신
1. 돼지와 닭이 식당을 차렸다고 합니다. 식당 이름이 햄 앤 에그. 식당은 날로 번창했습니다. 이유는 돼지는 자신의 살을 내놓았고, 닭은 자신의 자식도 아끼지 않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헌신이란 이처럼 자신의 것을 전부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헌신의 의미를 잘 담고 있는 구약의 제사가 있습니다. 번제입니다. 전부 다 태워 그 향기를 드리는 것 그것이 번제의 정신입니다. 태우면 냄새가 좋을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레 1장을 보면 다 태워서 드리는 번제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탄 냄새를 좋아하시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번제와 같이 온전한 헌신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분의 헌신
2. 전부를 드리는 번제는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헌신을 드릴 때 종종 큰 장벽이 됩니다. 우리에겐 “다 드리고 나면 난 어떻게 사나?” 이런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받으시는 헌신은 전부를 드리는 번제의 헌신 외에도, 부분을 드림에도 하고 그 부분을 전부로 받아주시는 ‘헌신’도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헌신은 대부분이 전부의 헌신이 아닌, 부분의 헌신입니다.

전체의 헌신도, 부분의 헌신도 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
3. 레위기 2장에는 곡물을 곱게 빻아 태워 드리는 제사인 소제(a grain offering)가 나옵니다. 번제와 소제의 공통점은 태워드리는 화제로써 둘 모두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레1:13,17, 레2:2,9)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제사는 태워 향기로 드릴 때 현격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번제는 전부를 태우는 것이라면, 소제는 그 중에 일정 부분의 기념물(기념할 것)을 태웁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는 전체를 온전히 다 태워 드리는 번제만이 아니라, 부분을 기념으로 태워 드리는 소제도 있습니다. 소제의 태워드리는 일부분, 그것을 한국어 성경에는 기념할 것으로 번역했고, 영어 성경(NIV)으로는 memorial portion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을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아즈카라’라고 했습니다.

아즈카라/Memoril Portion/기념할 것
5. 우리는 고작 일부분을 기념으로 드렸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의 전부로 받으신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아즈카라’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부자의 소한마리만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시거나, 여유 있는 사람의 양과 염소만 기쁘게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비둘기도 받으시고, 더 가난한 자에겐 곡식가루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선 우리의 형편과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저 삶의 한 움큼만 드릴지라도 그것을 전부를 드리는 번제의 온전한 헌신과 같이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아즈카라로서의 주일성수와 헌금 그리고 기도
6. 사실 우리가 드리는 주일예배도 사실은 전체가 아닌 부분을 드린 아즈카라(memorial protion)입니다. 우리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일요일이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일요일만 주님의 날은 결코 아닙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 전체, 365일 매일, 24시간 매분 매초가 다 주님의 날이요 시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전체의 시간을 다 번제로 드리라 하지 않으시고, 일주일 중 하루를 구별하여 주님의 날로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고작 일주일 중 1-2시간 정도를 예배로 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아즈카라(기념물)로 받으시면서 우리가 삶 전체를 온전히 드린 것으로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주일성수는 그렇게 아즈카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역대상 29장에서 부와 귀가 다 주께로부터 왔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참으로 진실합니다. 진실로 지금 우리 손에 있는 것 중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공급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며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모든 것이지만 우리가 돌려 드리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 중 가장 분량이 크고 그렇기 때문에 어려워하는 헌금을 말하자면 단연 ‘십일조’일 것입니다. 오죽하면 십일조 논쟁이라는 것이 생길 정도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어려운 십일조도 기껏해야 1/10만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손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권의 고백’으로 십일조는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수준과 삶의 형편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1/10만 드려도 하나님은 그것을 전체로 기념하여 전부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십일조와 헌금은 내게 있는 물질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고백의 의미로 드리는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을 나와 가족의 삶을 위해 쓰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만을 드려도 하나님은 그것을 전부로 받아주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드리는 헌금 역시 아즈카라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 역시 ‘아즈카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살전5장).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뜻대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의의 하늘 문을 열려면 쉬지 않고 기도해도 될까 말까인데 우리의 기도는 항상 너무 부족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늘 부족한 우리의 기도에도 항상 신실하게 그리고 넘치게 응답을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그 부족한 한번의, 한 순간의 기도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전체의 기도로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부족한 기도 역시 아즈카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심으로 드려야만
7.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헌금, 기도 모두 다 사실은 전부가 아닌 일부를 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부분을 받으시고도 그것을 기념하여 전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부분을 드려도 전부로 받아주신다고 해서 아무 것이나 드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일부분의 시간, 물질, 기도, 에너지가 아즈카라가 되기 위해선 일부분을 드릴지라도 반드시 ‘중심’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놓아야만 합니다. 주일성수는 우리의 삶의 그 어느 부분보다 우선순위에 놓여져야만 하고, 주일예배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드려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일을 지킬 때, 주일이 우리를 지켜주게 됩니다. 그 많은 시간을 다 나와 가족을 위해 쓰고 겨우 하나님께는 몇 시간의 부분을 드릴 뿐인데, 하나님은 그걸 전체로 받아주시고 우리 삶의 모든 날과 시간을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드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일부분의 헌금이 하나님이 전부로 받아주시는 아즈카라의 예물이 되기 위해선 한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바로 인색함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지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여전히 제물을 드렸지만, 그들의 제물은 인색함 그 자체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을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너희가 어찌 눈먼 것들, 저는 것들, 병든 것들로 하나님께 드리느냐 그것이 악함이 아니냐? 그런 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릴 수 있겠느냐?" 우리가 드리는 일부분의 물질이 아즈카라가 되기 위해서는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과 같은 짜투리의 것이 아닌 최상, 최선의 것으로 드려야만 합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기도가 온전한 기도로 하나님께 아즈카라로 드려지기 위해선 우리의 기도 역시 중심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금식기도가 중요합니다. 새벽기도, 금식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그 자체가 특별한 효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것이, 밥을 끊으며 기도하는 것이 가장 큰 헌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전래없는 부흥의 축복은 기도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식기도 중심의 기도생활로는 하나님이 전부로 받으시는 아즈카라의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부족한 기도이지만 중심을 드릴 때 우리의 기도는 아즈카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념하시다.
8. 막 14장에는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한 여인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그 귀한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게 맞지 않느냐?며 그녀를 책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향유옥합을 깨뜨린 그녀의 행동을 가장 귀한 ‘온전한 헌신’으로 받아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막14:9).” 그 여인은 한 순간 자신의 부분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것, 최상의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것을 아즈카라로, 전부의 헌신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와 그녀의 헌신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념(아즈카라)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부분이라도 최선을 다해 드리면 전부로 받으시고 영원히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시간, 물질, 재능, 기도, 은사를 중심으로 드리십시오. 전부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일부분만 태어 드리십시오. 단, 제대로 중심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전체로 받으시고 그것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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