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이웃] ‘선(線)’ 넘는 복음

[복음] [이웃] ‘선(線)’ 넘는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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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線)’ 넘는 복음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43) 예수님 말씀이시다.
유대인들이 들었다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사실, 구약 성경 어디에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없다. 이러한 가르침은 전형적인 장로들의 유전일 뿐이다.
‘미쉬나’(유대인들의 구약성경 주석)는 이웃사랑 계명을 해석하면서 유대인의 이웃은 같은 민족, 같은 야훼 신앙이란 선 안에서 한정된다 가르친다. 반면, 그들이 규정해 놓은 이웃의 범주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미워하고 배제할 수 있는 원수가 된다고 본 것이다.
유대인들이 들었던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그릇 고착된 성경해석이었던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그어놓은 이웃과 원수의 경계선을 지우신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어놓은 경계선 밖에 있는 어떤 사람도 우리 이웃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는 유대인들이 혐오하던 사마리아인도 이웃이 되고, 배제하던 이방인도 이웃이 되며, 전복의 대상인 로마인도 이웃이 된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질문에 대한 답은 자명해진다. “누가 이웃인가?“ 자신의 가치로 날카롭게 그어놓은 경계선을 지우고 예수님을 닮은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그 ‘이웃’이다.
이웃과 원수를 경계짓던 인간의 모든 선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이웃과 원수를 규정짓던 세상 모든 막힌 담은 허물어졌다. 언어와 인종이 달라도 이웃이고, 타종교인도 이웃이고, 신학적 견해가 달라도 이웃이고, 정치적 입장이 달라도 이웃이고, 웬수같은 그 인간도 이웃이다.
그도 이웃이라면 이제?… 사랑할 일만 남았다.
이를 위해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내가 그어놓은 바로 그 ‘선(線)‘을 넘는 것이다. 단순히 나이스한 것으로는 부족하다. 영화 기생충의 박사장은 누구보다 나이스했지만 그에게는 '선(線)은 넘지 말라'는 금기가 있었다. 박사장은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 모두에겐 ’적당한 선'이란 일종의 내가 규정한 한계선이 있다. 물론 적당한 선을 지킨다는 것은 서로의 영역에 대한 보호와 상호존중이란 의미에서 건강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적당한' 선이란게 도대체 어디까지냐인 것이다.
대체, 어디 선까지가 적당한 선일까? 대체 어디까지가 우리가 규정하는 이웃의 경계일까? 우리 중 누구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항상 여기에서 발생되는 문제는 대체 어느 선까지가 과연 나의 이웃인가이다.
자신의 이웃을 규정하는 적당한 경계선, 바로 그 지점에서 복음과 율법은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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