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간담상조肝膽相照] 권도근목사의 개인간증 한토막

[간증] [간담상조肝膽相照] 권도근목사의 개인간증 한토막

최고관리자 0 1920
간담상조(肝膽相照)
 
우리는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당하거나 실망했을 때, "언제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그러더만..." 이런 말을 합니다. 의학적으론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모든 걸 아낌없이 줄 것 같이 굴었다는 말이겠죠. 이걸 반대로 이야기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수 있는 관계야 말로 진정한 우정이라는 말이 됩니다.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인다는 뜻으로 <간담상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가림없이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신뢰가 두터운 우정을 의미합니다. 자랑할 것 별로 없는 제 인생에도 이런 멋진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대원 3년을 동거동락했던 형님들이 있습니다.

신대원에 입할 하던 2001년 때만해도 다리에 심각한 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2000년 중국 유학시 4층 기숙사 창문에서 만취한 채 그대로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기적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부지하긴 했지만 그 당시 저는 오른쪽 다리가 불구가 되어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한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감사했던 것은 오랜 병상의 시간 속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었습니다. 거짓말같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전혀 낙심은 커녕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 때 제게 강렬한 열망이 일어났습니다. 남은 삶을 중국에 복음을 전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은 열망이었습니다.

반년 정도의 시간을 중국 산동성 옌타이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어느 정도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건강을 되찾은 후에 한국으로 이송되어 왔습니다. 하루는 신대원 준비를 위해 가까운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다리 속에 박아 넣은 플레이트가 부러졌습니다. 중국에서 수술 받을 때 그래도 자기들이 갖고 있는 가장 좋은 독일제라고 했던 플레이트가 부러진 겁니다. 당시 중국의 정형외과 수술 기술도 우리나라에 비해 20년 이상 낙후되었고, 무엇보다 아마도 그게 짝퉁(?) 이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차.이.나.더라고요.

도서관에서 그 사고를 당했을 무렵, 긴급 수술을 받으려 하는데 마침 그 때 한국에선 전국적인 대규모 의료분쟁이 일어났던 때인지라, 어쩔 수 없이 대학 병원 엠블란스가 아닌 소방 구급차를 타고 고향 춘천의 작은 정형외과에서 3차 재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결과는? 역시 실패였습니다. 사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그 때 유일한 걱정은 신대원 시험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은 아무나 그냥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무슨 고시공부 수준이더라고요. 그렇게 병상에 누어 몇 개월을 공부하고 총신신대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M.Div 과정은 떨어지고 목회연구 과정으로 문 닫고 들어간 입학 첫날, 아버지와 함께 용인 양지 캠퍼스에 도착해보니 도저히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없는 눈덮힌 언덕 환경이었습니다. 입학 첫날 바로 휴학계를 내고 일년을 쉬고, 이듬해 2002년 목발을 짚고 다시 양지 캠퍼스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장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학우들의 기숙사가 아닌 장애우들 위한 기숙사 동 1층에 방을 배정받게 되었습니다. 잔뜩 쫄아서 가만히 기숙사 방구석에 앉아 있는데, 왠 형님들 세분이 왁자지껄하며 들어오시는 겁니다. 그 중 한 분이 시각장애를 갖고 계신 형님, 두 분은 그 분의 도우미 학우들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제 신대원 3년의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아.. 그 형님들... 생각만해도 행복해집니다.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하반신 불구 등 각 종 장애를 갖고 있던 형님들(시각장애 도우미 안내견을 데리고 다니던 전도사님을 빼곤 제가 나이가 제일 어렸습니다.)과 지냈던 3년의 시간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수업 빼먹고 박찬호 야구 경기 보던 추억, 하루 수업을 통째로 날리고 춘천까지 가서 닭갈비, 막국수 먹던 기억, 기숙사 창문을 열어놓고 학우들의 정서를 위해 나훈아 노래를 크게 틀어놓곤 했던 우리 방 풍경, 옆방 서비스견에 자꾸 먹이를 줘서 똥개 다 만들었던 형님들의 짖꾼은 만행, 힘겹게 함께 언덕을 올라 부르짖어 기도했던 추억, 신학교 뒷동산에서 몰래 고기 구워먹던 추억, 중국에서 사역할 때 함께 그곳까지 찾아와 함께 했던 시간들.. 지금도 다 너무 너무 그립습니다. 제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추억들입니다.
 
그 때 시각장애를 갖고 있던 룸메이트 형님이 대구 사투리로 한번씩 하시던 이야기가 여전히 정겹습니다. 나는 우째 글렀으니, 오리 농장이라도 해서 니 사역 뒷바라지 할 거라던.... 그 형님은 지금도 장애 청소년들을 위해 전국 자전거 투어를 하곤 하십니다. (3년 전엔가는 미국 횡단을 홀로 하시려 오셨다가 시카고 외딴 곳에서 트럭에 밀려 비명횡사하실 뻔도 했네요). 그리고 도우미로 섬기시던 형님은 대구에서 개척을 하시어 지금 멋지게 사역하고 계십니다.
 
이 형님들이 여전히 제겐 '간담상조'의 우정을 나누는 분들이십니다. 자주 보지도 못하고, 연락 조차 뜸하곤 하지만 몇년 만에 만나도 어제 본 것처럼 항상 편안한 형님들이십니다. 엊그제 춘천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 형님이 명절이라고 과일을 보내오셨다는 겁니다. 실은 무녀독남의 외아들인 제가 중국에서 10년, 미국에서 8년째 살다보니 저 대신 제 부모님 생각에 이따끔씩 전화로 안부도 물어오셨고, 이렇게 명절이면 과일도 보내주신 겁니다. 지난 주 고향 집 주소를 물어보시길래 주소는 모르고 전화만 한 통 넣어주세요라고 했더니 어떻게 아셔서 보내신 겁니다. 과일 한박스지만 제 마음이 얼마나 든든하고 따뜻해지던지요. [....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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