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쉐퍼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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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7 15:11
프랜시스 쉐퍼,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
1. 책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듯 이 책은 이성을 절대화 하고, 진리는 상대화시키는 세상 풍조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쓰여졌다. 프란시스 쉐퍼는 불변의 진리인 성경으로의 회귀만이 이성의 절대적 자율성을 고수하다 혼란과 절망에 빠지게 된 현대인들을 구출할 수 있다 주장한다.
2. 이 책은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시작한다. 이성의 절대화라 하면 르네상스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아퀴나스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쉐퍼는 아퀴나스의 신학이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이 세계를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누고 각각을 ‘은총’(하늘과 하늘에 속한 것)과 ‘자연’(땅과 땅에 속한 것)으로 명명했다. 사실, 아퀴나스 이전의 사람들은 하층부 즉 자연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아니, 지나치게 경시했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그러나 아퀴나스의 등장으로 ‘자연’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을 쉐퍼는 상당히 고무적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자연 역시 하나님의 창조세계이기 때문이다.
3. 하지만 여기에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에서 인간의 의지(will)는 타락했으나 여전히 지성(mind)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주장(인간의 불완전한 타락)함으로 아퀴나스의 의도와는 달리 인간의 지성은 절대적 자율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사실 아퀴나스의 신학은 상층부와 하층부의 통일성을 견지했지만, 인간의 불완전한 타락을 주장함으로 그가 부여하게 된 인간의 자율성은 자연 즉 하층부의 영역을 지나치게 급상시켜, 결국 자연이 은총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4. 그 결과 자연 신학과 철학은 성경의 계시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작용은 르네상스를 지나며 미술과 음악과 기독교 교육, 일반 교육 등 인간의 거의 모든 영역에 미치게 되었다. 바야흐로 상층부와 하층부가 완전히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쉐퍼는 상층부에선 무한하신 하나님이 절대자가 되고, 하층부에선 인간의 이성이 절대자가 되어버린 상.하층부의 완전한 단절 현상이 인간을 자유하게 만들기는 커녕 도리어 인간을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게 되었다 주장한다. 쉐퍼가 말하는 절망이란 단순한 감정적 절망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절망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지식과 삶에 대한 통일된 해답을 바라던 희망을 포기하는 데서 오는 절망이다. 현대인은 통일된 해답에 대한 합리적 희망을 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합리주의와 자율적인 반항을 고집한다. ... 이제까지 인간이 갈망하던 것이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절망 가운데 사는 것이다.”(p.87).
인간이 지금까지 갈망하던 것이 무엇인가? 상층부와 하층부 모두를 아우르는 통일된 해답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잇닿아 있다.
5. 쉐퍼는 "무슨 이름이로든 하층부가 자율적으로 되면 순식간에 하층부가 상층부를 잠식한다 결론지으며, 그 결과는 하나님만 자취를 감출 뿐 아니라 자유와 인간 역시 사라지고 만다."(p.154) 고 주장한다. 그러면 쉐퍼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 책의 제목이 바로 그 대안이다.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인간 이성을 무시하자는 것인가? 아퀴나스 이전의 사람들처럼 하층부(자연)을 무시 혹은 경시하자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인간 이성에 부여했던 자율성을 계시(성경)의 절대적 권위 아래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쉐퍼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참되고 통일된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 강조한다.
인간은 의지 뿐만 아니라 이성 역시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이성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쉐퍼는 오직 성경만이 상층부와 하층부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과 자연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제시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강조한다.
6. 프랜시스 쉐퍼의 ‘거기 계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은 ‘여기 계시는 분’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거기 계시는 하나님은 단순히 초월자로 계시어 이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분이 결코 아니심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쉐퍼는 거기 계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이심을 강조한다.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쉐퍼가 비판한 자유주의신학, 신비주의 등과 같은 상층부에 대한 비합리적 도약이 아니라 합리적 체계 속에서 구체적인 계시의 내용을 믿는 것이다.
7. 거기 계시는 하나님은 계시의 말씀을 통해 상층부와 하층부 전 영역을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만을 중시하고 육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플라톤식 이원론을 배격하는 동시에,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절대화하는 모든 인본주의 또한 배격해야 한다.
하나님은 은총의 영역인 상층부에 대한 참된 진리를 계시로 말씀하시고, 자연 즉 우주와 인간에 대한 참된 사실도 계시로 말씀하신다(p.51). 우리의 이성은 성경의 계시 아래 겸손히 통제된 자율성을 누려야 한다. 그 때에 우리는 비로소 이성을 통해 이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을 수 있게 된다. 즉 쉐퍼가 말하는 ‘어둠 속에서의 도약’이 아닌 절망에서의 참된 도약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8. 쉐퍼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양자 모두가 하층부의 계몽에 기여했다 본다. 그러나 쉐퍼는 종교개혁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전인(全人)에 관심을 가진 반면,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지나친 자율성을 부여한 결과 심각한 한계에 직면했음을 강조한다. 르네상스 이후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마음껏 행동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의 한 예로, 쉐퍼는 르네상스는 오랫 동안 억압되어 왔던 여성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긴 했지만 외설의 범람과 퇴폐와 같은 전반적인 부도덕을 낳게 되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9.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베아트리체와 마주친 단테>를 묘사한 헨리 홀리데이의 그림과 그 아래 쉐퍼의 설명이다(p.59). 단테는 첫 눈에 반한 베아트리체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랑을 지극히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문제는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는 동안, 그의 아내는 그저 자신을 위해 아이를 낳고 가사를 돌보는데 필요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감각적인 사랑은 하층부에 속하지만, 정신적인 사랑은 상층부에 속한다는 통일성의 상실은 결론적으로 인간 세계에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을 낳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10. 이성의 자율성은 계시의 통제 아래 발휘되어야 한다. 계시는 하늘과 하늘에 속한 지식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계시의 빛은 상층부를 뚫고 하층부에 닿는다. 그 계시의 조명 아래에 놓인 이성만이 이 세상과 인간을 위한 참된 역할을 하게 된다. 쉐퍼의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는 이성의 폐기 혹은 홀대가 아닌 이성을 제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종교개혁의 정신과 믿음처럼. 쉐퍼는 바로 그러한 정신과 믿음만이 이 세상에 희망을 주며, 참 인간됨을 구현할 수 있게 해준다 주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