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수업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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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2 15:14
상실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1. '죽음의 여의사', '죽음학의 대가'. 저자의 별명입니다.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30년 이상 호스피스 운동에 투신하여 그 누구보다 실제적인 죽음을 가까이서 연구해 온 분입니다. 죽음과 그토록 가깝게 지냈던 그녀는 자신의 생의 마지막 9년간을 몸이 마비된 채로 침대에 누워있게 됩니다. 이 책은 저자의 마지막 선물 같은 유작(遺作)입니다.
2. 이 책은 부제처럼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에 관한 것입니다. 저자는 상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라 하며 사랑을 위해 상실을 수용하라 권고합니다.
3.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 그 핵심은 충분히 애도하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단계를 밟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부정Denial-분노Anger-타협Bargaining-절망Depression>이란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 과정을 무시하지 말고 존중(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할 때 그 사람은 마지막 수용Acceptance의 단계로 성큼 나아갈 수 있다 합니다.
4. 성급히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저자가 말하는 '수용'이란 단지 괜찮아지거나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진정한 수용이란 상실한 상태의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즉 상실의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슬픔의 힘은 희한하게도 슬픔을 치료하는 자체 효력을 갖고 있다. 어쩌면 아직도 슬픔의 초기에 있을 수 있고, 어쩌면 상실을 미리 예감하는 감정에서 다시 시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그것은 들쑥날쑥한 감정의 주기를 끝마친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걸 말끔히 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실의 고통이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탄생과 죽음의 주기를 완전히 따르므로 삶을 충만하게 경험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상실을 견뎌내고 살아남았다. 슬픔과 애도의 힘이 우리를 치유하고, 잃었던 그 사람과 함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그것이 바로 슬픔의 은총이며, 슬픔의 기적이다. 그것이 곧 슬픔의 선물이다." (p.298)
5. 이 책을 읽으며 상실을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교회 문화가 그리워졌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야곱도 요셉도 상실의 슬픔 가운데 충분히 애통하며 울었습니다(창 23:2, 37:34, 50:10). 예수님도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11:35). 우리 하나님께서는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분이시지, 슬픔을 억압하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겐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6.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실이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자연이 그러하듯, 우리네 인생 역시 상실을 통해서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상실수업>을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 현재 삶에 대한 진지하고도 겸손한 태도를 배울 수 있고, 또한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미루지 않는 사랑과 용서의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상실수업. 비록 아프지만 인생학교의 필수과목임은 틀림없습니다.
1. '죽음의 여의사', '죽음학의 대가'. 저자의 별명입니다.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30년 이상 호스피스 운동에 투신하여 그 누구보다 실제적인 죽음을 가까이서 연구해 온 분입니다. 죽음과 그토록 가깝게 지냈던 그녀는 자신의 생의 마지막 9년간을 몸이 마비된 채로 침대에 누워있게 됩니다. 이 책은 저자의 마지막 선물 같은 유작(遺作)입니다.
2. 이 책은 부제처럼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에 관한 것입니다. 저자는 상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라 하며 사랑을 위해 상실을 수용하라 권고합니다.
3.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 그 핵심은 충분히 애도하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단계를 밟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부정Denial-분노Anger-타협Bargaining-절망Depression>이란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 과정을 무시하지 말고 존중(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할 때 그 사람은 마지막 수용Acceptance의 단계로 성큼 나아갈 수 있다 합니다.
4. 성급히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저자가 말하는 '수용'이란 단지 괜찮아지거나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진정한 수용이란 상실한 상태의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즉 상실의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슬픔의 힘은 희한하게도 슬픔을 치료하는 자체 효력을 갖고 있다. 어쩌면 아직도 슬픔의 초기에 있을 수 있고, 어쩌면 상실을 미리 예감하는 감정에서 다시 시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그것은 들쑥날쑥한 감정의 주기를 끝마친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걸 말끔히 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실의 고통이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탄생과 죽음의 주기를 완전히 따르므로 삶을 충만하게 경험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상실을 견뎌내고 살아남았다. 슬픔과 애도의 힘이 우리를 치유하고, 잃었던 그 사람과 함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그것이 바로 슬픔의 은총이며, 슬픔의 기적이다. 그것이 곧 슬픔의 선물이다." (p.298)
5. 이 책을 읽으며 상실을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교회 문화가 그리워졌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야곱도 요셉도 상실의 슬픔 가운데 충분히 애통하며 울었습니다(창 23:2, 37:34, 50:10). 예수님도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11:35). 우리 하나님께서는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분이시지, 슬픔을 억압하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겐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6.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실이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자연이 그러하듯, 우리네 인생 역시 상실을 통해서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상실수업>을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 현재 삶에 대한 진지하고도 겸손한 태도를 배울 수 있고, 또한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미루지 않는 사랑과 용서의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상실수업. 비록 아프지만 인생학교의 필수과목임은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