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발.효.중

讀讀讀.똑똑똑, 이 책 추천해도 될까요?

슬.픔.은 발.효.중

최고관리자 0 199
슬.픔.은 발.효.중
 
내 친구는 선교사입니다. 내 친구가 사는 곳은 필리핀 루손섬 공동묘지 마을 ‘샤몰로그’란 곳입니다. 처음 샤몰로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엔 성경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거라사 광인, 그는 무덤가에 사는 버려진 인생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도, 기억하지도 않게 되었죠. 사람들에게 그는 그저 ‘어느 동네의 미친놈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네, 그것이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유일한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한 광인을 위해 기꺼이 배를 띄우시고 광풍을 뚫고 저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리곤 다른 특별한 일 없이 다시 배를 타고 이편으로 건너오셨습니다. 거라사 광인은 적어도 예수님껜 그 어떤 대상이 아닌, 단 하나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내 친구가 어느날 바다 저편을 건너가 언어도 인종도 문화도 다른 낯선 땅 샤몰로그라는 공동묘지 마을에 살고 있는 이유는 그런 예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차마 모른척 할 수 없었던 내 친구가 이번에 정말이지 보석같은 책을 썼네요.
‘슬픔은 발효중’
김치나 막걸리가 발효 중이라면 금방 이해가 될텐데 ‘슬픔이 발효 중’이라니요? 사전을 찾아보면 발효란 효모나 세균같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시키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미생물에 의해 유기물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유익한 물질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그 과정을 발효라고 부르고, 유해한 물질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그 과정을 부패라고 부릅니다. 그러고보니까 내 친구의 책 제목은 참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막힙니다. 슬픔이 부패가 아닌 발효의 과정으로 인식될 수 있다니요. 그것도 내 친구와 같은 삶의 궤적을 갖고 있는 이에게 말입니다.
‘슬픔은 발효중’이라고 말하는 내 친구는 ‘자살 유가족’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자살 유가족이란 딱지는 사람들이 거리를 두려 한다는 점에선 적어도 거라사 광인이란 딱지와 별단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슬픔은 부패 중으로 흘러가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현상일텐데, 자살 유가족인(그것도 엄마와 오빠 두 가족의 자살을 경험한) 내 친구는 ‘슬픔은 발효중’이라고 합니다.
자살 유가족으로 어린아이 시절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혼돈의 시간을 통과해온 내 친구, 지금은 바다 저편 낯선 공동묘지 마을로 건너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고 있는 내 친구가 ‘슬픔은 발효중’이라고 말한다면 전 정말이지 믿고 싶습니다. 분명 슬픔은 우리 삶에 유해한 무엇보단 유익한 무엇을 만들어낼 가능성이자 희망일 수도 있음을 말입니다.
내 친구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슬픔이 발효되기 위해선 반드시 ‘충분한 애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자신의 책을 통해 상실로 인해 아파하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껏 슬퍼하라 등을 토닥여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상실수업’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상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이상, 우리에겐 그 대상을 잃어버린 상실의 아픔과 상처는 현재진행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실 앞에서 충분히 애도하며 슬퍼하며, 나아가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슬픔이 발효되는 충분한 애도가 필요합니다.
팀 켈러는 그의 책 '죽음에 관하여'에서 상실의 아픔과 애도에 대해 말하며, '소망에 절인 슬픔'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그는 소금에 절인 고기가 썩지 않듯, 슬픔도 소망이라는 소금에 절이면 그 슬픔은 상하지 않고 오히려 지혜와 긍휼과 겸손과 애정이 싹튼다고 합니다. '소망에 절인 슬픔'은 '발효 중인 슬픔'과 사실은 하나의 결을 갖는 표현이자 완벽하게 일치하는 의미임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지요. 우리 민족의 대표적 발효식품인 김치를 담그려면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과정은 필수니까요.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내 친구는 이 책의 추천사를 제게 부탁했었습니다. 감사했고 동시에 제겐 과분한 영광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치만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 뻔한 이 좋은 책에 제 이름 석자를 올리고 싶은 욕심도 솔직히 생겼드랬습니다. 하지만 탈고된 원고를 마지막으로 읽고나서는 전 도무지 추천사를 쓰지 못하겠노라 친구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고, 특별히 모든 상실의 아픔으로 신음하고 있는 분들에게 이 책이 조금이라도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제 안에 일어났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무명의 사람으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제가 나서 감히 추천사를 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한을 풀려고 책 추천글을 이렇게 겁나 길게 쓰고 있는 겁니다.
부디 보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게 되었으면 좋겠고, 자기 주변에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선물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이 책을 통해 모든 사람에겐 상실을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숭고한 권리가 있음을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겐 슬픔을 절일 수 있는 소망이 필요하고, 우리에겐 슬픔이 발효될 충분한 애도가 필요하다 외치는 내 친구의 목소리에 더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이 책의 저자 박경임, 내 친구는 선교사라 했지요. 내 친구가 바다 저 편으로 건너가 살게 됐던 유일한 이유가 된 성경을 열어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란 사람도 야곱도 요셉도 상실의 슬픔 가운데 충분히 애통하며 울었음을 보게됩니다. 예수님도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음을 알게됩니다. 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분은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분이시지, 결코 우리의 슬픔을 억압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 친구가 전하는 복음과 내 친구가 쓴 이 책은 상실의 아픔을 겪는 모든 슬픈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발효는 반드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내 친구의 슬픔은 지금도 여전히 발효 중입니다. 내 친구는 그 지난한 과정 속에서 당신의 슬픔도 나의 슬픔처럼 부패가 아닌 발효의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당신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조용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당신의 곁에서 함께 그 고통의 시간을 버티며 기다려주겠노라 말을 건넵니다. 그렇게 이 책을 통해 모든 상실한 이들의 진실한 벗이 되길 바라는 친구의 따뜻한 마음을 저도 배우고 싶습니다. 이젠 비틀거리는 당신에게 슬픔의 눈물일랑 어서 닦아버리고 웃으라 재촉하지 않겠습니다. 힘겨워하는 당신에게 어서 빨리 일어나라 뛰어라 밀어부치지 않겠습니다. 상실로 인해 슬퍼하는 당신을 결코 다시는 정죄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슬픔도 발효중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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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 새겨진 상실은 극복하거나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실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실의 아픔이 옅어질 뿐,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박경임, 슬픔은 발효중.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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