說.來臨 설래임 ❙ “사랑, 부활을 살다” (feat. 꽃들에게 희망을) ❙ GBC 미주복음방송 Fri 7PM
說.來臨 설래임 ❙ “사랑, 부활을 살다” (feat. 꽃들에게 희망을) ❙ GBC 미주복음방송 #부활신앙 #사랑의길 #꽃들에게희망을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솔직하게! 아플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애벌레 기둥을 오르는 삶>을 요구합니다. 기둥의 꼭대기에 올라가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가능한 기둥 높이 올라가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귀를 기울이며 기둥을 오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 더 높이 오르는 동안 우리는 비정한 경쟁 구도 안에서 점점 친구도 잃고, 이웃도 외면하게 됩니다. 어느새 우리의 삶엔 우정과 사랑의 가치는 사라지고, 승자독식-약육강식의 잔인한 공식만 남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의 삶을, 가족의 삶을, 타인의 삶을 희생시켜가며 진액을 짜내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있지만, 문제는 거기엔 우리가 원했던 것, 간절히 바랬던 것, 삶의 의미-행복 그런 것들이 <거기엔 없더라>라는 것입니다. 애벌레 기둥의 꼭대기에 올라가봤는데 결국 아무 것도 없는 허무와 공허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성경의 교훈 특별히 해 아래서의 삶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전도서의 교훈입니다. 그렇기 때문의 해 아래서의 삶은, 반드시 해 위의 영원한 삶-부활의 삶과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벌레 기둥을 오르는 허무한 삶에서 우리는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애벌레 기둥의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성경의 외침을 틀어 막습니다.
이미 다 알면서도, 저 아래 동료와 이웃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음을 절대로 알리지 말라 합니다.
그저 자신이 그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고 스스로 확인하고 비정한 마음 뿐입니다.
설.래임 청취자 여러분, 그렇게 애벌레 기둥을 오르는 삶에 결국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줄무늬 애벌레가 느꼈던 허무와 공허, 실망과 분노만이 가득하게 될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 단 한번뿐인 정말 귀한 인생입니다.
이 귀한 인생, 정말 진액을 다 짜내며 열심히 으로고 또 올랐는데 거기에 아무 것도 없다면 얼마나 불행하고 불쌍한 인생이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애벌레 기둥을 오르는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의 길이 있다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우리 주님께선 이제 곧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곁으로 가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새계명을 주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들려드린, 동화책의 제목이 기억나십니까? <꽃들에게 희망을>이었습니다. 그런데, 꽃은 안나오고, 애벌레 두 마리만 나온다. 왜 꽃들에게 희망을! 일까요?
나무에 매달려 고치안에 들어 가 있던 늙은 애벌레가 노랑 애벌레에게 했던 말을 다시 들려드리겠습니다.
“나비......... 그것은 네가 되어야 하는 바로 그것을 뜻하는 거란다. 그것은 아름다운 날개로 하늘을 날며, 하늘과 땅을 이어주기도 하지. 그것은 꽃에서 나오는 달콤한 꿀만을 마시면서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사랑의 씨앗을 운반해 주기도 한단다." "나비가 없어지면 따라서 꽃도 자취를 감추게 된단다."
애벌레와 나비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애벌레는 기어다니지만, 나비는 화려한 날개짓으로 날아다닙니다.
애벌레는 풀잎을 뜯어 먹고 살지만, 나비는 꽃에 있는 달콤한 꿀을 먹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표면적인 차이일 뿐입니다. 애벌레와 나비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들의 행동이 가져다 주는 결과입니다. 나비의 삶이 애벌레와 궁극적으로 다른 점은 나비의 삶은 또 다른 생명인 꽃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비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의미합니다.
나비가 날아오르는 것은 나비 자신만을 위한 비행이 아닌,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행위이듯, 교회는 그렇게 존재해야 합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이 꽃들에게 희망이 되듯, 교회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 희망이 되기 위해서 합니다.
세상에, 이웃에, 서로에게 희망이 되는 교회와 성도. 그러한 교회와 성도는 더 이상 애벌레 기둥을 오르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애벌레 기둥 꼭대기가 아닌, 나뭇가지에 올라 거기서 누에를 치고, 그 속에서 나비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선택과 행위를 우리는 ‘부활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누에 속의 시간은 어둡고 캄캄합니다. 마치 죽은 것도 같습니다. 네! 이전 것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늙은 애벌레의 말처럼 겉모습은 죽은 듯 보여도, 참모습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아니, 진짜 우리의 참모습을 비로소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소망하는 <부활>인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늙은 애벌레가 노랑 애벌레에게 나비가 될 수 있음을 증거했듯이, 노랑 애벌레가 줄무늬 애벌레를 인도하며 기다려주며, 나비가 될 때까지 그 곁을 지켜주었듯이, 교회는 세상 모든 애벌레 기둥에서 허우적대는 인생들에게 그들도 나비가 될 수 있음을, 그들도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고 예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부활의 증거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섬김의 삶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진정한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먼저 나비가 되어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랑의 행위를 보여주어야만 합니다.